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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명림의 퍼스펙티브

주민이 직접 씻어낸 4·3의 상처, 인류의 공동유산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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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인류의 한 작은 마을 ‘제주 하귀리’에 서서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제주 하귀리의 추모단인 영모원(英慕園)이 건립 20주년을 맞는다. 나라 전체의 어떤 기념일도 아닌데 몇 주년이라고 말하는 것은 언뜻 보면 과장 같고 어색하지만 영모원 20주년은 절대 범상치 않다.

하귀리는 냉전 초기인 제주 4·3 당시 세계와 한국의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의 분할 과정에서 가장 큰 희생을 당한 마을의 하나이자, 냉전 해체 이후 가장 감동적인 화해와 상생의 사례이기 때문이다. 마을 명부에 따르면 이 마을에서는 무려 286명이 학살을 당했다. 물론 제주 전체가 하귀리와 같은 가공할 참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4·3 희생자 추모 영모원 20돌…과거극복의 보편 모델 제시
항일열사·한국전 전몰자 함께 봉안, 화해와 통합 정신 빛나
피해자와 희생자, 진보와 보수 등 이분법 편가르기 무의미
남아공 진실·화해모델 못잖아…유네스코 등재할 가치 충분

이념대결에 희생된 주민 286명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 영모원. 올해 설립 20년을 맞았다. 제단 왼쪽부터 항일 독립운동가, 한국전 참전군인, 4·3 희생자의 비석이 차례로 놓여있다. [중앙포토]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 영모원. 올해 설립 20년을 맞았다. 제단 왼쪽부터 항일 독립운동가, 한국전 참전군인, 4·3 희생자의 비석이 차례로 놓여있다. [중앙포토]

영모원이 건립된 2003년 5월은 아직 중앙 정부의 최종 제주 4·3 진상보고서가 채택되기 전이었고, 전체 제주 차원에서도 제주4·3평화재단이 만들어지기 이전이었다. 마을 단위에서 해원과 상생의 결과가 먼저 도출된 것이었다.

영모원은 이 마을 출신 항일 애국열사와 한국전쟁 전몰 호국인사와 4·3희생자의 영령을 한 곳에 모신 합동 위령제단이다. 그 좁은 제단이 ‘국가를 위한 희생’과 ‘국가에 의한 희생’을 한 곳에 모신 가장 넓은 통합과 화해의 장소인 것이다.

화해를 위한 마을의 움직임은 매우 신속했다. 마을 화해의 최종 산물인 영모원 건립을 위한 첫걸음은 4·3광풍에서 잃어버린 마을 이름 하귀리를 다시 찾기 위한 노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귀리는 4·3 당시 1구와 2구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4·3의 폭풍을 겪고 난 뒤 각각 동귀리와 귀일리로 이름 자체가 바뀌었다. 대학살도 억울한데 이념적 낙인과 갈등으로 마을 이름의 상실과 함께 공동체 정체성도 잃어버린 것이었다.

1975년부터 자체 복원 노력 시작

자료에 따르면 마을 이름의 첫 복원 노력은 1975년부터였다. 매우 일렀던 것이다. 권위주의 시기 동안의 중단 이후 민주화와 탈냉전 직후인 1991년 두 마을 대표들은 복원 노력을 재개하여 곧 합의를 이루었다. 이어서 동귀와 귀일에서 동시에 주민총회를 개최하여 만장일치로 인준하였다. 이념이 할퀴고 간 두 마을의 마음과 정체성의 복원과 통합을 함께 의미했다. 주민들의 만장일치 청원에 대해 1992년 북제주군 의회는 조례개정으로 화답하였다.

모든 주체에게 잃어버린 본래 이름의 복원은 단순한 명칭의 회복을 넘는 의미를 지닌다. 이념과 갈등, 폭력과 학살로 인한 상실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동귀와 귀일 주민들의 만장일치는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화해와 통합의 전체 의지를 상징한다. 사태 이전의 고향과 시원으로의 회귀를 통해 사태와 사태 이후 학살과 낙인을 치유하고 극복하려는 시도였다.

마을 통합과 복원으로 하나가 된 하귀리 주민들은 이후 오랜 대화와 준비를 거쳐 2003년 마침내 영모원을 제막하였다.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자발적인 과거 극복과 통합 사례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항일과 호국과 희생의 영혼을 통합하여 고향으로 인도하는 절대통합과 절대정신 앞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어머니 품 같은 본향으로의 회귀는 모든 인간의 궁극적 소망이다. 모태인 고향은 삶의 출발이자 원형이기에, 고향 상실은 실낙원이요 고향복원은 복낙원인 이유다.

국가폭력 이겨낸 상생의 몸짓

제주 4·3은 우리에게 어둠도 빛도 가장 뚜렷한 표징의 하나로 다가온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제주는 세계 이념대결의 전초 한반도의 끝단에서 세계 이념폭력과 냉전 대결의 최대 희생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오늘날 제주는 전체 한반도와 세계에 거꾸로 화해와 상생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4·3 이후의 과정은 국가폭력의 극복과 관련하여 세계를 대표하는 한 보편모델이기에 충분하다.

4·3 이후 제주민들의 슬픔과 분노, 억압과 공포는 죽음 못지않은 삶이었다. 그러나 생명과 해원, 인권과 정의를 향한 그들의 의지는 중단되지 않았다. 진실과 관용, 정의와 화해를 향한 아래로부터의 열망이 나라의 민주화와 만나자 비로소 법률과 제도, 중앙과 지방의 정부기구와 의회를 통한 과거 극복이 본격화하였다.

이후 끝내 제주 4·3모델이라고 불릴만한 경지에 도달한다. 희생자·유족과 국가, 피해자와 가해자, 민과 관, 중앙과 지방, 진보와 보수의 핵심 영역들 모두에 걸쳐 제주 4·3은 대화와 타협, 진실과 사과, 정의와 화해, 치유와 통합이, 폭력 이후 사회로서는 최고 수준에서 어우러진, 한 보편적 경로를 보여준 세계적 모델이 아닐 수 없다.

진영대결 무너뜨린 민주적 타협

핵심적인 주요 과정만 살펴보더라도 ①‘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 과정 ②‘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설치와 운영 ③‘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의 채택 과정·내용·공표, ④‘제주4·3평화재단’의 설립·성격·구성·운용·역할 ⑤하귀리 영모원(英慕園)의 건립과정과 포용명부 범위 ⑥유족회와 경우회의 화해·상생 선언 ⑦‘4·3국가추념일’ 제정과 행사 ⑧4·3특별법 전부 개정과 배·보상 ⑨직권 재심 ⑩트라우마 회복 조치 등 최초 입법부터 공식보고서 채택을 거쳐 배·보상과 재심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단계와 과정은 제주 4·3의 모범성을 상징한다.

특히 4·3문제 극복에 관한 한 중앙정부, 의회, 정당, 지방정부 모두에서 진보와 보수 사이의 차이는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 몇몇 왜곡과 상처 덧내기 시도에도 불구하고 보수와 진보 정부 모두 궁극적으로는 제주공동체의 합의와 요구를 수용하였다. 즉 4·3의 해결 과정 자체가, 진영대결이 극도로 심각한 한국에서 그것을 극복하는 민주적 타협과정을 증거한다.

정부보다 앞선 공동체의 합의

여기에는 더욱 중요한 요소가 존재한다. 문제를 중앙 정부와 의회로 가져가기 전에 제주공동체 내에서 먼저 거의 완벽한 합의를 도출해내었다는 점이다. 절제와 중용의 미덕이었다. 즉 4·3의 해결 과정은 제주로부터 발원하여 중앙이 수용한, 한국의 과거 극복의 사례인 동시에 진영 타협의 경로이자 민주주의의 실천 과정이었다.

지금까지 인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진실·화해 모델을 대표적인 과거 극복의 경로로 여겨왔다. 맞다. 그러나 이제 제주 4·3의 정의·화해 모델이야말로 진실·화해 모델을 넘는 바람직한 보편모델로 여겨진다. 해결 과정은 물론 이후의 사회 통합과 안정성의 측면에서도 제주 4·3은 크게 앞선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많은 분야에서 선진국에 도달한 대한민국은 이제 과거사 극복에서도 하나의 선도사례를 갖게 되었다. 진실규명, 명예회복, 사과와 관용, 정의와 화해, 배·보상, 추념과 기억, 미래교육, 지속가능성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면에서 선도적 경로를 보여주는 제주 4·3모델을 갖게 된 것이다. 우리가 4·3과 제주인들의 상처를 덧내기보다는, 치유를 북돋아야 하는 이유다.

무고한 살상은 더는 없어야

이제 제주 4·3은 사건 자체와 극복 과정의 기록과 기억을 인류공동 유산이자 정신으로 세계와 공유할 때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하나의 길이다. 4·3의 기록들은 2차 세계대전 직후 세계냉전, 이념대결, 국가폭력, 그리고 민간인 학살 자료들을 한눈에 보여주는 매우 희귀하고 고유한 인류의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세계의 모범적인 화해와 상생의 기록들이기도 하다. 요컨대 세계냉전과 인류화해의 기억과 유산으로서 인류사적 보존 가치가 충분하다.

군경과 민간은 물론 워싱턴과 마을에 이르기까지, 정부 공식기록으로부터 마을별 기록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록은 독특하고 특별하다. 하나의 사건을 통해 보편성과 토착성, 갈등과 화해, 폭력성과 인간성 전체에 대한 소우주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것이다. 제주 4·3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통해 제주 4·3 기록이 갖는 세계성과 고유성을 인정받고, 나아가 극복과정 자체가 세계모델로 자리매김하길 소망한다. 인류의 한 귀퉁이 하귀에 서서 다시는 세계에 인간 생명에 대한 무고한 대량살상이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