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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민정의 생활의 발견

침묵은 등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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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민정 시인

김민정 시인

갑자기 개나리가 피고 불현듯 목련이 터져 이른 봄꽃 출렁대는 뉘 집 담 위를 사진 찍어 보냈더니 남쪽 사는 지인의 답장은 돌연히 피었다는 벚꽃 자랑으로 꽤나 분홍분홍했다. 매번 우리 왜 이렇게 호들갑인가 하면 소리 없이 부지불식간에 당도한 봄이고 꽃에 그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어서일 거다. 몇 월 며칠 몇 시에 당도하니 딱 기다리라는 기별. 봄이 어디 말을 앞세운 적이 있었던가, 꽃은 늘 제때 몸으로 보여오지 않았던가.

이렇듯 침묵을 힘으로 묵묵히 제 책임을 다해내는 자연 앞에 내가 유독 경외로 두리번거리며 좇는 데가 있으니 거기, 등이다. 곡선의 안도랄까, 둥긂의 위로랄까. 위로 산등성이를 올려다볼 적에 아래로 파도의 등줄기를 내려다볼 적에 휘어서 구부러진 굽이, 그 굴곡에 시선을 두노라면 목젖까지 차올랐던 색색의 말이 삼킨 물처럼 희고 투명해지기도 하니 사람들 그렇게들 산으로 바다로 여행들 떠나는 것이겠다.

생활의 발견

생활의 발견

말다툼 끝에 끊어진 전화에 화를 어쩌지 못하다 뱉는 즉시 칼이 될 말을 참느라 사과 한 봉지를 칼로 다 깎은 적이 있다. 처음엔 한 알 깎아 먹는 일로 입을 다물려 했는데 모기향처럼 원을 그리며 구불구불 깎여나가는 사과 껍질이 참으로 정직하다 싶으니까 여남은 개의 사과를 다 깎지 아니할 수 없었다. 살을 다 드러낸 사과와 속을 다 들켜버린 나의 마주함. 예의 나의 부끄러움은 이내 나의 두려움으로 갈변했다. 예의가 아니면 말하지 말라 했거늘 평생 나는 내 말의 즉흥과 내 말의 도취로부터 어찌 나를 지키려나.

산책하는데 집 근처 작은 텃밭에 쪼그려 앉아 호미질하는 할머니가 있어 한참을 서 훔쳐보았다. 말이 아니라 몸을 쓰는 사람의 등은 알처럼 둥글구나. 할머니의 바지런한 손놀림을 따라 쉴 새 없이 땅을 이는 호미가 흙 속 작은 돌에 부딪혀 캉캉 소리를 내는데 귀가 연신 쫑긋 솟았다. 지금껏 차마 입이 없어 말을 못 한 것은 아니었구나. 자연이 감춘 비밀을 자연히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김민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