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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의 컷 cut

그래도 되는 ‘사회적 약자’라니? 연진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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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권석천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권석천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그리운 연진에게,

오늘은 너와 내가 주인공인 드라마 ‘더 글로리’(넷플릭스)의 한 장면을 얘기해볼까 해. 혹시 기억나니? 연진아. 학교 체육관에서 너희들이 고데기로 내 몸에 화상을 입힐 때. “나한테 왜 이러는데?”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내게 너는 이렇게 답했지. “난 이래도 아무 일이 없고 넌 그래도 아무 일이 없으니까.” 그 다음에 친절한 설명이 이어졌어.

“아무도 널 보호하지 않는다는 소리야. 동은아. 경찰도, 학교도, 니 부모조차도. 그걸 다섯 글자로 하면 뭐다? 사회적, 약, 자.”

컷 c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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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귀를 의심했어. 연진아. 아, ‘사회적 약자’가 누군가를 괴롭히는 언어가 될 수 있구나. 힘든 이들을 지켜줄 거라 믿었던 그 말이 칼날로 날아오는구나. 아무리 극단적 상황을 그리는 대사라고 해도 ‘사회적 약자’가 멸칭(蔑稱·경멸해 일컬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웠어. 연진아.

매일 생각했어. 연진아. 너의 그 말이 사람들 마음속 차별의식을 끄집어낸 것은 아닐까. 그 다섯 글자가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남기고 있진 않을까. 어떤 용어가 타락하는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니? 연진아. 그건 너무 쉽고 가볍게 불리기 때문일 거야. ‘사회적 약자를 위한다’는 식의 영혼 없는 레퍼토리들이 그 말을 만든 선의를 오염시키기 때문일 거야.

그거 아니? 연진아. 헌법엔 이런 구절이 있대.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나는, 아니 우린 정부나 사회, 너희가 굽어살펴야 할 ‘약자(弱者)’가 아니야. 국가에 우릴 지지하고 보호하라고 말할 수 있는 국민이고, 시민인 거지.

일방적 시혜의 대상은 곧 혐오의 대상이 되는 거 같아. 진정 사회적 약자를 생각한다면 그들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지 않는 한 결국 이 사회는 ‘너희들의 체육관’일 뿐이잖아. 그렇지? 연진아.

권석천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