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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홍진채의 퍼스펙티브

황금알 키운다고 영양제 주사해 거위 죽이는 일 없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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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요즘 자본시장 대세, 행동주의 펀드의 과제

홍진채 라쿤자산운용 대표

홍진채 라쿤자산운용 대표

행동주의 투자가 자본시장을 뜨겁게 달궜다. 대형 연예기획사와 은행을 대상으로 한 행동주의 투자가 상당한 성과를 거두면서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이에 자극받은 여러 행동주의 투자자들이 각자의 타깃을 상대로 싸움을 시작했고, 시장의 관심은 어느새 ‘다음 타깃’이 어디인가로 설왕설래하는 중이다. 주주총회 시즌을 맞아 감독 당국도 자산운용사들에 책임 있는 의결권 행사를 요구했다.

한국의 자본시장은 주주자본주의가 정착되지 않아 전 세계에서 자본효율성이 가장 낮다. 이에 따라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의 평가를 받고 있다. 자본효율성은 자본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사용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자기자본이익률(ROE)이 대표적인 지표다. 자본은 질 좋은 물건에 높은 가격을 매긴다. 질이 낮은 한국 주식이 나쁜 평가를 받는 것은 ‘저평가’가 아니라 ‘합당한’ 평가다. 행동주의의 역사가 유구한 미국은 세계 최고의 자본효율성을 보여준다. 이웃 대만도 배당, 자사주매입 소각 등으로 기업의 잉여금을 주주에게 돌려주는 주주환원이 늘면서 주가가 장기간 올랐다. 한국 자본시장도 행동주의 바람이 불면서 자본효율성이 높아져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해소되는 전기를 맞을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그 길이 순탄치만은 않다. 사회적으로도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한국 증시 자본효율성 떨어져
코스피 낮은 건 ‘합당한 평가’

배당 등 주주환원 요구 과도하면
임직원 사기저하 등 부작용 우려

행동주의 펀드 결국 돌려줄 자금
‘먹튀’ 논란에서 자유롭기 힘들어

기업의 초과이윤은 정말 주주의 몫인가

주식회사는 주주의 출자로 설립된다. 기업에 고용된 임직원이 급여를 받고, 기업에 제품과 서비스를 공급하는 여러 업자들이 그에 대한 대가를 받으며, 채권자들은 이자를 받는다. 매출액에서 이 모든 비용을 제하고 남긴 이익에는 세금이 붙는다. 납세의 의무까지 끝내고 남은 이 돈, ‘순이익’은 당연히 주주의 몫이다. 국가·직원·협력사·채권자 등 모든 이해당사자가 그때그때 제 몫을 챙겨가는 동안 주주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다. 가장 먼저 출자해 회사 설립에 기여하고, 가장 나중에 남은 몫을 가져간다. 가장 큰 위험을 짊어졌으므로 초과이윤은 응당 주주의 몫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임직원들은 정말로 노고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받았나. 고객은 기업의 폭리에 휘둘리지 않았나. 세율은 적당한가. 단지 합법적으로 사업을 수행하고 세금을 냈다 하여, ‘자본가’들은 막대한 이윤에 대한 ‘정당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가.

주식투자자들은 ‘그렇다’고 배우면서 주식투자를 시작한다. 회사의 내부자가 이익을 빼돌리거나, ‘쓸데없이’ 사내에 과도한 유보금을 쌓아두는 행태에 분노하며 회사에 주주환원을 요구한다. 불법적인 이익 훼손은 당연히 처벌받아야겠지만, 불법이 아닌 선에서의 비용 지출과 이익 유보에 대해서 ‘부당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기는 쉽지 않다. 케인스는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하이에크의 주장에 맞서 “당신의 주장이 옳다 하여도, 그래도 우리는 어디엔가 선을 그어야 합니다”라고 답했다(니컬러스 웝숏, 『케인스 하이에크』). 옳고 그름을 떠나서, 우리는 어디엔가 선을 그어야 한다. 선을 그으려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은행의 주주환원율이 높아지면서 주가가 한참 상승하던 어느 날 불호령이 떨어졌다. “은행은 공공재다.” 은행에 잔뜩 쌓인 유보금이 ‘과도한 수준’이며 ‘주주가치를 훼손’하기 때문에 주주환원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 대출이자를 조금이라도 더 깎아주면 자영업자의 숨통이 트이고, 예금이자를 높여주면 금융지식이 부족해 예·적금에만 의존하는 사람들의 생계가 나아진다. 은행은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기관’으로서 금융위기나 경기침체 시 진화에 나설 의무가 있다. 작년의 금리 인상과 무역적자, 환율 급등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금융위기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은행에 적용되는 보수적인 규제 덕분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논리 앞에 행동주의 투자자들은 어떤 주장을 내세울 수 있는가. 한국의 행동주의 투자는 아직 자본력이 부족해 개인투자자의 호응과 여론에 의존하는 면이 크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개인투자자 수가 급격히 늘어나 행동주의 투자에 큰 힘이 됐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에는 주식투자 인구보다는 은행에 예금을 들고 소상공인 대출을 받고 부동산이 재산의 대부분인 사람들이 훨씬 많다. 이들 앞에서 ‘주주환원을 통한 자본효율성 개선’은 그저 ‘있는 자들 간의 싸움’으로 비칠 수 있다.

지금이야 행동주의 투자가 관심을 끌고, 관심을 끄니 주가가 오르는 선순환이 반복되며 모두가 행복한 듯하지만,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서 개인투자자들이 등을 돌리는 가운데 ‘대중의 이자를 짜내서 이익을 취하는 자본가’라는 프레임을 누군가 씌운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어쩌면 진짜 싸움은 그때부터일 수도 있다.

주주환원, 근본을 무너뜨리지 않는가

주주환원은 ‘창출해낸 이익’에 대해 주주의 몫을 가져가는 문제다. 이는 당연히 ‘이익이 존재함’을 전제로 한다. 만약 행동주의 투자의 ‘의도치 않은’ 결과로 이익을 창출하는 기업의 근본이 흔들린다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거위가 낳는 황금알의 크기를 키우려고 영양제를 마구 주사했더니 거위가 죽어버렸다면?

훌륭한 제품과 서비스는 기업이 작동하는 근본 원리다. 기업 임직원들은 오늘도 그저 열심히 일하고, 소비자는 그 제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며 가치를 누린다. 주주환원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사람들은 주주와 경영진이다. 만약 주주환원 요구가 격해지다가 경영권 분쟁이 불거진다면, 그로 인한 임직원의 사기 저하와 인력 이탈, 사내 정치의 만연, 제품의 질 저하가 없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해당 업계 출신이 아닌 사람이 경영진으로 선임돼 더욱 합리적인 경영을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일각에 있다. 경영을 전혀 모르고 해당 업계에서 밑바닥부터 커온 사람이 경영을 맡았기 때문에 비효율적인 경영을 한다는 가정이다. 정말로 그러한가? 경영의 질은 상당 부분 ‘전문성’보다는 ‘태도’의 문제다. 다른 사람의 이익을 갈취해 본인의 이익을 챙기려는 태도로 인해 비효율적인 자본 배분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딱히 ‘경영학 지식’이 부족해서는 아니다. 다시 말해, 업계 출신이 아닌 사람이 경영진으로 선임된다 하여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더 나은 경영을 보장할 수는 없는데 직원들의 불안감을 가중하는 선택이라면 올바른 선택이라 할 수 있는가?

‘먹튀’ 논란을 극복할 수 있는가

행동주의는 기업으로부터 무언가를 뜯어내는 게임이다. 물론 기업의 자본효율성이 구조적으로 개선돼 장기간 파트너십 관계를 유지하며 윈윈할 수는 있다. 아름다운 그림이며, 많은 행동주의 투자자가 이를 지향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기관투자자의 자금 원천은 다양하며, 그중에는 특정 시기에 돈을 돌려주어야 하는 자금이 상당히 많다.

행동주의는 한 번의 싸움에 많은 것을 쏟아부어야 한다. 상당히 에너지 소비가 큰 작업이며 긴 호흡을 필요로 한다. 만약 시장의 관심을 받아서 단기간에 주가가 급등했다면, 그래서 본인들이 최종 승리했을 때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가격에 미리 도달한다면, ‘대의’를 위해서 끝까지 ‘명분’을 고수할 기관투자자가 얼마나 될까.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은 나쁜 일을 하게 마련이다. 뭔가가 유행하면 너도나도 뛰어들어서 물이 흐려지곤 한다. 행동주의가 대중적으로 유행하면 너도나도 행동주의를 표방하며 ‘한탕 해 먹으려는’ 집단이 나타날 수 있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 합법적으로 일하더라도 ‘먹튀’ 논란에서 자유롭기 어려운 게 행동주의다. 그런 와중에 남을 속여먹으려는 의도로 행동주의의 탈을 쓴 세력이 난립한다면 이 생태계가 건강해질 수 있을까.

주주가치는 현대 자본시장을 구성하는 핵심 메커니즘의 하나다. 그러나 그 작동방식을 설명하기는 상당히 난해하며, 우리 사회에서는 지금까지 무시되어왔다. 한국도 나름대로 짧지 않은 행동주의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법의 한계와 사회적 관심의 부족으로 많은 실패를 겪어왔다.

행동주의가 반드시 기업과 장기간의 파트너십을 가져갈 필요는 없다. 개별 행동주의 사건이 ‘치고 빠지는’ 양태로 반복된다 하더라도 자본배분을 비효율적으로 하는 기업에 경고를 던져줄 수 있다면 전반적으로 시장은 건강해지고 ‘창조적 파괴’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실이 이 사회 전체의 생산성과 복지의 향상으로 돌아온다는 사회적 합의가 없다면 다수의 눈에 비치는 것은 그저 ‘먹튀 자본’과 ‘뼈를 깎는 구조조정’, ‘소비자 기만’일 것이다.

한국은 여러모로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지만 세계 자본시장을 대표하는 지수인 MSCI에서는 신흥국에 포함돼 있다. MSCI 선진국 지수에 포함되는 기준은 흔히 생각하는 경제 규모나 1인당 국내총생산(GDP) 순위가 아니다. 한국이 지적받고 있는 내용은 외국인의 자본시장 접근성과 기업지배구조 등이다. 외국인을 배척하면서 기업이 누구를 위해 움직이고 있는지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는 모습은 말 그대로 후진적이다.

현재 여러 시운이 맞물려 행동주의 투자가 주목받으면서 한국 자본시장은 체질 개선의 기로에 놓여 있다. 진정한 체질 개선에 이르기에는 넘어야 할 벽이 많다. 사회적 합의가 잘 이뤄져 부디 한국의 국격에 맞는 자본시장을 갖추게 되기를 바란다.

◆홍진채 대표=1982년생. 서울대 전기공학부 졸업. 대학 시절 투자동아리(SMIC)에서 활동하며 투자 고수로 이름이 났다. 2007년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에 공채 1기로 펀드매니저로 일하며 3000억원 이상의 자산을 운용했다. 2016년 독립해 라쿤자산운용 설립해 대표이사로 일한다. 『주식하는 마음』, 『거인의 어깨』를 썼다.

홍진채 라쿤자산운용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