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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승우의 미래의학

의료계의 ‘붉은 여왕 효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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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박승우 성균관 의대 교수·삼성서울병원 원장

박승우 성균관 의대 교수·삼성서울병원 원장

최근 국내 의료 관련 뉴스는 의사 인력 부족에 따른 비상 상황이 주를 이룬다. 이런저런 대책도 제시되고 있다. 의료계에선 예전부터 SOS를 외쳤지만, 일반인들은 막상 그 경고가 현실로 드러나기 전까지는 심각성을 이해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로 수년 전 흉부외과 지망 의사 부족 현상이 큰 문제가 되자 대책이 나오기 시작했고, 최근엔 소아청소년과 등 비인기 분야를 지망하는 젊은 의사가 없어 일부 대형병원마저 소아응급실 운영을 포기하고 신규 입원을 중단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비로소 그 심각성이 절실히 느껴지는 요즘이다.

쉬지 않고 달리는 동화 속 얘기
하루 하루 달라지는 의료 환경
의사 인력난 어떻게 풀어가나
글로벌 경쟁시대에 발 맞춰야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이에 대한 해결책도 다양하다. 한쪽에서는 의대 학생수 증원을, 다른 쪽에서는 기존 의료인력의 효율적 재배치를 주장하고 있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정답’이라 확신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필수 의료인력 부족이라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서울대 배곧병원, 청라지구 아산병원, 세브란스 송도병원 등 새로운 대형병원이 수도권에 계속 문을 열 예정이라 현재로선 의료인력 확충이 필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 상황만으로 의사가 부족하다고 판단할 순 없다. 제대로 된 전문의를 배출하려면 의대와 전공의 과정을 수료하기까지 10년이란 기간이 소요되기에 이들이 의료현장에 진출할 10년 뒤의 의료 수요를 정확히 예측해야 한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10년 뒤 우리나라의 인구 구성이 어떻게 될지는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고령화는 더욱 진행될 것이 확실하다.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이 다시 올라갈 수 있을지, 아니면 이민을 적극적으로 받아야 할지 등등 변수가 너무나 많다.

10년 뒤 기술 발전도 고려해야 한다. 필자가 처음 의사가 됐을 때 가장 오랜 시간이 들어간 업무는 환자 정맥주사 놓기, 약 처방전 쓰기, 영상의학과에서 찍은 사진 찾아오기 등이었다. 지금은 전산 시스템 발달하면서 대부분 자동화되어 시간이 크게 줄어들었다. 또 예전에는 의사 업무이던 것이 요즘은 간호사가 새로운 의료기기의 도움을 받아 하기도 한다. 시대에 따라 의사의 역할이 달라지고 있다.

이처럼 환경이 급변하고 있지만 여전히 보조인력의 업무 범위를 놓고 갈등이 빚어지고 있고, 법률 또한 급속한 기술의 발달에 따른 의료환경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실정이다. AI 및 의료기술 발달에 따라 의료 인력의 업무 범위를 예측하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다. 예전 잣대를 고집할 수 없다는 뜻이다. 급변하는 의료환경에 적응하려면 어쨌든 변화에 발맞춰 계속 달려가야 한다.

‘붉은 여왕 효과’라는 경영학 용어가 있다.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후속작인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나오는 달리기 경주 에피소드에서 따온 것이다. 붉은 여왕의 나라에서 달리기 시합을 하던 앨리스는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인 것 같은 느낌이 들자 “왜 주변 풍경이 변하지 않느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붉은 여왕은 “여기는 쳇바퀴 위야. 제자리에 있으려면 계속 달려야 하지. 만약 다른 곳에 가고 싶다면 적어도 두 배는 더 빨리 달려야 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무슨 의미인지 쉽게 이해하실 것이다. 경쟁 상대에 맞서 숨이 턱에 차오를 정도로 뛰어야만 겨우 제자리를 유지할 뿐 멈춰서는 순간 영원히 도태되고 만다는 냉정한 현실을 은유하고 있다.

의료 분야 역시 ‘붉은 여왕 효과’에서 예외일 수 없다. 더욱이 이제는 글로벌 경쟁으로 확장되고 있기에 기존 프레임에 안주하는 순간, 국내 의료계 전체가 도태될 수밖에 없다. 눈앞의 규제 패러다임에 갇혀 글로벌 의료시장에서 퇴장할 것인지, 이제라도 뛰어서 현 위치라도 유지할지, 아니면 국내 첨단 IT산업, 바이오산업과 함께 두 배 빨리 달려 세계를 선도하는 의료선진국이 될 것인지 결정해야 할 운명의 시간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이미 우리 의료계는 글로벌 의료 시장이라는 무한경쟁 경기장 트랙에서 의료선진국에 뒤처지면서 빨간 경고등이 들어와 있다. 필수 의료분야 인력이 모자라는 비상 상황에 대한 대안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여기에 미래 인구 구조 예측과 첨단 기술의 급속한 발전이 가져올 의료 현장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 가능한 의료 인력 구성이라는 복잡한 난제를 풀어야 한다. 정책 입안자와 의료 현장 실무자 간의 긴밀한 협조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절실한 시점이다. 일단은 뛰면서 답을 찾아야 하지 않겠나.

박승우 성균관 의대 교수·삼성서울병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