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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램 줄줄이 감산하는데, 삼성 ‘초격차’ 겨냥 무감산 승부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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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0호 14면

반도체 혹한기 감산 딜레마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가운데)이 지난달 17일 삼성전자 천안캠퍼스를 찾아 반도체 패키지 라인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 삼성전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가운데)이 지난달 17일 삼성전자 천안캠퍼스를 찾아 반도체 패키지 라인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 삼성전자]

“초격차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인위적 감산에 동참하지 않는다.” 삼성전자의 경계현 디바이스솔루션(DS)부문 사장이 올해 경영 방침 설명회에서 한 말이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글로벌 반도체 업황이 급격히 나빠졌지만 삼성전자는 이처럼 “인위적인 감산은 없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반면 SK하이닉스의 노종원 사업담당 사장은 지난해 3분기 경영 실적 설명회에서 “시장 환경에 맞춰 상당한 규모의 투자 축소로 수급 균형을 앞당기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당시 노 사장은 “생산 증가를 위한 투자를 최소화하고 공정 전환 투자도 일부 지연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SK하이닉스는 올해 10% 이상 감산하고 설비 투자도 50% 이상 축소하기로 했다.

한국 수출의 핵심 분야인 반도체 산업을 이끄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감산 딜레마’에 빠졌다. 감산하면 제품 재고가 줄면서 수급 불균형이 완화돼 눈앞의 수익성 악화 우려를 덜 수 있다. 하지만 업황이 다시 좋아졌을 때 기존의 감산 여파로 생산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제대로 대응을 못 하면서 득보다 실이 클 수도 있다. 결국은 수반될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인데 삼성전자는 감산하지 않는 쪽을, SK하이닉스는 감산하는 쪽을 택했다. 두 기업의 상이한 기조에 시장에선 이들 기업이 감산을 하는 것이 나은지, 안 하는 게 나은지를 놓고 설왕설래 중이다.

“삼성, 가장 공격적 가격 경쟁 펼쳐”

두 기업이 처한 위기 상황은 비슷하다. 반도체를 생산했는데 당초 예상보다도 안 팔리고 있다. 지난해 9월 전년 동기 대비 5.6% 감소했던 국내 반도체 수출액은 올해 들어 40% 이상 급감했다(1월 -44.5%, 2월 -42.5%).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주력 품목인 메모리 반도체가 불경기 여파로 글로벌 수요 부진이 심각하다”며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많은 스마트폰과 클라우드 등의 분야에서 소비가 줄고 기업들이 투자를 줄이고 있어 당분간 회복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수요 부진으로 반도체 가격이 하락하면서 재고가 심각하게 쌓이고 있다.

실제로 시장 조사 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서버용 D램 제품의 계약 가격은 전기 대비 DDR4가 23~28%, DDR5는 30~35% 하락했다. 트렌드포스는 “고객사의 반도체 수요가 동결되자 재고 처리를 위해 공급 업체들이 가격을 낮추고 있다”며 “D램 가격이 올해 1분기 20%, 2분기에 11% 추가 하락하고 낸드플래시도 같은 기간 각각 10%, 3% 더 떨어질 것”으로 예측했다. 업계에 따르면 D램의 경우 현재 17주 이상의 재고량이 있으며, 이게 일정 수준 소진돼야 가격도 반등할 공산이 크다.

국내 반도체 재고율(재고/출하 비율)은 이미 지난해 7월 150.7%에서 올해 1월 265.7%로 반 년 사이 115%포인트 치솟으면서 1997년 3월(288.7%) 이후 26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기업 입장에서 재고 급증은 수익성 악화로 직결된다. 기업들이 올해 영업이익에서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관측되는 이유다. 증권가는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이 지난해 43조원대에서 올해 16조원대로 60% 넘게 줄고, SK하이닉스의 영업이익도 지난해 12조원대에서 올해 7조원대로 40% 가까이 감소할 것으로 보고 있다(최근 3개월간 증권사들이 발표한 전망치의 평균값 기준).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우울한 업황과 수익성 악화 우려에 해외 반도체 기업은 적극적인 감산 또는 관련 투자 축소에 나서고 있다. 주요 외신에 따르면 D램에서 삼성전자·SK하이닉스에 이은 세계 3위 업체인 미국의 마이크론은 올해 20% 이상의 감산과, 설비 투자 30% 이상 축소를 결정했다. 낸드플래시에서 삼성전자·SK하이닉스에 이은 세계 3위 업체인 일본의 키옥시아 역시 올해 30% 이상 감산을, 4위인 미국의 웨스턴디지털은 설비 투자 20% 이상 축소를 각각 선언했다. 세계 1위 파운드리(위탁생산) 업체인 대만의 TSMC도 설비 투자 10% 안팎 축소를 결정했다. 모두 한국의 두 기업보다 더 과감히 허리띠를 졸라매고 제품 가격 방어에 나서려는 것이다.

삼성전자의 무(無)감산 전략은 이런 글로벌 흐름에 역행하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외려 “삼성전자이기에 가능한 전략”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장균 전 현대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지난해 삼성전자는 D램 시장점유율 43%를 기록하는 등 메모리 반도체에서 지배적인 기업이라 공격적인 가격 경쟁과 승리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며 “고정 거래처가 (단발성 거래처보다)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도 감산보다 생산량 유지가 나은 이유”라고 분석했다. 예컨대 지난해 4분기 세계 D램 시장 매출은 전기 대비 32.5% 감소했다. 그러면서 기업들의 D램 매출도 줄었는데 삼성전자는 매출 감소 폭이 상대적으로 낮았다(-25.1%). 지난해 4분기 삼성전자의 D램 시잠점유율은 45.1%로 3분기(40.7%)보다 오히려 높아졌다.

대만 TSMC도 설비 투자 10% 축소

트렌드포스는 “삼성전자는 가장 공격적인 가격 경쟁을 펼치면서 시장 전반의 수요 부진에도 출하량을 늘릴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경계현 사장이 ‘초격차 경쟁력’을 언급한 것도 단순한 감산이나 가격 인하보다는 기술력이 더 중요하다는 판단과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된다. 이런 관점에서 SK하이닉스의 감산 전략이 적절하다는 반응도 나온다. 이장균 전 위원은 “SK하이닉스의 점유율 등을 고려했을 때 삼성전자처럼 감산하지 않거나, 마이크론·키옥시아처럼 20% 넘게 감산하는 것보다 (감산 수준을) 10%선으로 정한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가는 대응 수준”이라며 “기업별로 처한 세부 상황이 다르다고 보면서 ‘맞춤형 전략’을 세운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삼성전자의 전략을 100% 무감산이라고 보긴 어렵다는 분석도 있다. 김동원 KB증권 연구원은 “삼성전자는 지난달 14일 사업 운영 자금 확보를 위해 계열사인 삼성디스플레이로부터 20조원 규모 차입을 결정했다”며 “메모리 반도체 사업에서 14년 만에 적자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53조원에 달하는 국내 설비 투자액을 충당하기 위한 것으로, 사실상 ‘간접적 감산’과 같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측이 강조한 ‘인위적’이라는 단어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인위적으로 감산하진 않겠지만 상황에 따라 기술 공정 변환이나 공장 가동 조절로 ‘자연적’ 감산에 나설 수도 있음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어서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기본적으로 허리띠를 졸라맨다는 기업의 기존 계획에 변동이 없어야 실적 반등이 가능하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도현우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챗GPT’ 열풍에 인공지능(AI) 관련 수요 등을 기대해, 투자를 다시 늘리려 시도 중인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지만 AI 관련 수요는 전체 서버 수요의 5%에 불과하다”며 “하반기 반도체 업황과 수급이 회복되려면 기업들이 최소 기존 계획 수준 이상의 투자 축소나 감산을 하는 게 필수”라고 지적했다. 백길현 유안타증권 연구원도 “재고 조정 본격화로 메모리 반도체의 가격 하락 폭이 예상보다 높은 수준일 수 있다”며 “기업들이 반도체 혹한기가 길어질 수 있다고 보고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삼성·TSMC 공격적 채용, 인텔은 수천명 감원

반도체 업황의 한파 속에 국내·외 기업들은 감산이나 설비 투자 등 ‘유형 자산’ 관리뿐 아니라 인력 운용이라는 ‘무형 자산’ 관리에서도 상반된 대응에 나서고 있다. 삼성전자와 TSMC 등 여력이 있는 기업은 인재 수혈에 여전히 힘쓰고 있다. 삼성전자 DS부문은 지난달 초부터 반도체 공정, 설계, 소프트웨어, 설비, 인프라 등 다양한 부문에 걸쳐 경력 공채를 진행 중이다. 특히 이번 채용에선 ‘경력 4년 이상 혹은 석사 2년, 박사 학위 보유자’라는 기존 우대 사항을 ‘경력 2년 이상 혹은 석·박사 학위 취득자나 취득 예정자’로 확대했다. 예년보다 폭넓게 인재를 충원하겠다는 기조를 내세운 것이다. TSMC도 최근 대만의 주요 대학에서 채용 설명회를 열고 올해 6000명 이상의 엔지니어를 채용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삼성전자와 TSMC가 업황 침체를 뒤로하고 공격적인 채용에 나선 것은 감산이나 투자 축소보다 고급 인력 확보와 기술 경쟁력 유지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TSMC는 올해 설비 투자를 10% 안팎 축소하기로 했지만, 지난해 12월엔 미국 애리조나에 있는 공장에 대한 투자액을 기존보다 3배가량 많은 400억 달러로 늘리는 등 최근까지도 대규모 투자에 힘썼다. 경쟁사들이 인력 감축에 나서는 동안 거꾸로 우수 인재를 유치, 시장 경쟁에서 계속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SK하이닉스도 올해 예년과 비슷한 규모의 채용에 나설 전망이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2027년 상반기 첫 팹(공장)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많은 인원이 필요하다”며 “우수 인재에 대한 채용 기조를 유지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나머지 기업은 비용 절감을 위한 인력 감축에 힘쓰고 있다. 미국의 인텔은 지난해 10월 수천 명 감원에 나섰다. 마이크론도 전체 인력의 10%를 줄인다고 발표했다. 중국의 양쯔메모리(YMTC) 역시 지난 1월 저성과자 10%를 해고했다. 업계 관계자는 “향후 업황 반등까지 고려하면 인력 확보에 더 힘쓰는 게 좋지만, 눈앞의 상황 때문에 그러지 못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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