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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재고율 26년 만에 최고…한국수출 시름 깊어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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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반도체 한파가 길어지면서 한국의 경제 회복이 더뎌질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5일 기획재정부·산업통상자원부 등에 따르면 지난 1월 반도체 재고율은 265.7%로 1997년 3월(288.7%) 이후 25년 10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불과 한 달 새 111.7%포인트나 뛰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이는 고금리·고물가 등에 따른 글로벌 경기 침체로 정보기술(IT) 소비 수요가 얼어붙은 탓이 크다. 특히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세계 경기의 영향을 많이 받는 메모리 분야에 편중돼 있어 외풍에 더 쉽게 흔들린다. 높은 재고율은 반도체 업황 부진이 당분간 이어질 거란 점을 시사한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시장은 수요 부족과 공급 과잉의 상황으로 재고가 소진될 때까지 반도체 단가가 더 하락할 여지가 있다”고 진단했다.

반도체는 한국 산업의 ‘심장’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같은 최상위권 대기업은 물론 소재·부품·장비 등 다양한 중소기업이 반도체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경제의 반도체 의존도가 워낙 높다 보니, 글로벌 반도체 경기 부진의 여파는 고스란히 국내에 전이될 수밖에 없다.

당장 수출에 빨간불이 켜졌다. 지난달 반도체(59억6000만 달러)를 제외한 전체 수출액은 441억 달러로 1년 전보다 0.8%(3억 달러) 증가했다. 자동차·이차전지 등 다른 품목이 호조를 보인 결과다. 하지만 반도체를 포함하면 부호가 ‘플러스’에서 ‘마이너스’로 바뀐다. 반도체를 포함하면 전체 수출은 501억 달러로 같은 기간 7.5%(41억 달러) 줄어든다. 반도체 수출이 전년 대비 42.5%(44억 달러)나 급감한 영향이다. 반도체의 업황 부진이 전체 수출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대한상공회의소의 ‘반도체 산업의 국내 경제 기여와 미래 발전전략’에 따르면 2010~2022년 중 국내 경제성장률(평균 3.0%) 가운데 반도체 수출의 기여도는 0.6%포인트다. 반도체 수출을 빼면 이 기간 경제성장률은 2.4%로 떨어진다는 얘기다. 보고서는 또 반도체 수출이 10% 감소하면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0.64%포인트, 20% 감소하면 1.27%포인트 하락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반도체가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010년 10.9%에서 지난해 18.9%로 크게 늘었다.

이런 구조는 한국 경제에 ‘양날의 검’으로 작용한다. 반도체 경기가 좋아져 한국 반도체가 해외에서 많이 팔리면 한국 경제가 살아나고, 반대로 반도체 경기가 나빠지면 수출이 줄어 경제가 가라앉는다. 결국 과도한 반도체 편중이 글로벌 호황 때는 득이 되지만, 불경기 사이클에서는 국가 경제 전체에 타격을 주는 셈이다.

정부도 반도체 업황 부진에 대한 우려를 드러내고 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지난 2일 비상경제장관회의 겸 수출투자대책회의를 주재하고“반도체 경기의 반등 없이는 당분간 수출 회복에 제약이 불가피한 어려움이 큰 상황”이라고 말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회는 반도체 시설투자 세액공제율을 8%에서 15%로 올리는(대기업 기준) 내용의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 처리를 계속 미루고 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세계 각국이 법인세, 연구개발(R&D)·설비투자 관련 세액공제, 첨단기술에 대한 투자지원 등 추가적인 반도체 지원 정책에 나서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천구 대한상의 SGI 연구위원은 한국 반도체 산업의 미래 전략으로 메모리 편중구조 해소를 주문했다. 김 연구위원은 “상대적으로 경기 영향을 덜 받는 시스템 반도체 수출 비중을 늘리고, 비메모리 분야 성장을 위해 팹리스·파운드리 등의 국가·기업 간 협력 관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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