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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고 기품있네, 낭만발레의 정수 ‘지젤’ 원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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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9호 18면

파리오페라발레단 30년만에 내한  

‘지젤’ 2막 윌리들의 군무. [사진 POB]

‘지젤’ 2막 윌리들의 군무. [사진 POB]

30년 만에 찾아오니 더 반갑다. 1669년 창단해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파리오페라발레단(POB)이 한국을 찾았다. 1993년 세종문화회관의 ‘지젤’ 공연이 첫 내한이었고 이번이 두 번째다. POB는 다른 명문 발레단에 비해 순회공연이 드물고, 아시아권에서 유독 한국 공연 성사가 어려웠던 만큼 3~4일 대전예술의전당과 8~11일 LG아트센터 서울에서의 무대에 발레 팬들의 관심이 쏠렸다. POB의 간판스타인 에투알(수석무용수) 도로테 질베르 회차를 포함해  전석 매진을 앞두고 있다.

1841년 ‘지젤’ 초연한 발레 종가

그런데 POB는 이번에도 ‘지젤’을 들고 왔다. 1841년 최초로 ‘지젤’을 올린 원조 발레단이며 무엇보다 섬세하고 우아한 것이 강점이라 낭만발레의 정수인 ‘지젤’만큼은 세계 최강이라는 자부심이 읽힌다.

‘지젤’은 어떤 작품일까. 병약하지만 춤추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는 시골처녀 지젤과 귀족청년 알브레히트, 그리고 지젤을 흠모하는 힐라리온이 주인공이다. 지젤은 알브레히트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처녀유령 윌리가 되는데, 죽어서도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알브레히트를 지킨다는 내용이다. 지젤은 1막에서 청순한 매력을 과시하고 2막에서는 사랑의 힘으로 애인의 생명을 구하는 성숙한 여인의 영혼을 춤춘다. 초연 무용수 카를로타 그리시를 비롯해 파블로바, 쇼비레, 프라치, 폰테인 등 지젤 역으로 세계적 입지를 굳힌 거장 발레리나들이 즐비한 것을 보면, 순수한 백조와 요염한 흑조를 소화해야 하는 고전발레 ‘백조의 호수’와 함께 ‘프리마 발레리나’가 되기 위한 통과의례 작품인 것을 알 수 있다.

‘지젤’의 최초 탄생과정을 알면 그 내용이 더 애절하게 다가온다.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시인 테오필 고티에는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에서 영감을 얻어 극본을 썼는데, 정작 ‘지젤’을 만든 동기는 발레리나 그리시의 춤추는 모습을 보고 연모하게 되면서다. 그녀를 주인공으로 모든 것을 구상했지만, 그리시는 이미 ‘지젤’의 공동 안무가 쥘 페로와 연을 맺고 있었다. 결국 고티에는 그리시가 아니라 그리시의 언니와 인생을 함께 했다. 얼마나 가슴 짠한 사연인가. ‘지젤’에는 고티에의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진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고티에의 절절한 감성은 아돌프 아당의 아름다운 음악을 덧입고 파리 초연에서 대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곧바로 무대에서 사라졌고, 1884년 러시아의 전설적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가 재안무한 버전이 지금까지 불멸의 사랑을 받고 있다.

프티파가 장 코랄리·쥘 페로가 공동안무한 원작의 의도를 충분히 반영했기에 전 세계 대부분의 발레단이 프티파 버전을 따르고 있다. 유명 발레단의 버전 별로 구성이나 동작 면에서 큰 차이점을 찾기 어려운 이유다. 그런데 ‘지젤’만큼 비교하며 보는 재미가 쏠쏠한 작품도 드물다. 발레단마다 크게 다르지 않은 구성으로 섬세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마린스키발레단은 냉소적인 여성 군무가 강점이라 2막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순백의 튀튀를 입은 군무를 보고 있노라면 ‘발레 블랑(백색 발레)’의 몽환적인 매력에 순간적으로 빠져든다. 볼쇼이발레단 또한 약간은 경직된 듯한 분위기로 영적 신비감을 드러내는 것이 특징이다. 두 러시아 발레단이 정적인 매력을 강하게 보여주는 2막과 화려한 무대연출에 주력하는 반면,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의 경우 자유로운 감성 표현이 뛰어나다. 알브레히트에게 배신당하고 죽음에 이르는 1막 지젤 실성 장면에서의 연기가 압권이다. 수석무용수로 활동하고 있는 서희가 2012년 내한공연으로 선보여 극찬받은 바 있다.

솔리스트 강호현도 무대 올라

이번 공연은 은퇴를 앞둔 에투알 도로테 질베르(왼쪽)를 국내에서 만날 수 있는 귀한 무대다. [사진 POB]

이번 공연은 은퇴를 앞둔 에투알 도로테 질베르(왼쪽)를 국내에서 만날 수 있는 귀한 무대다. [사진 POB]

그렇다면 POB가 보여줄 프랑스 스타일은 어떤가. 1991년 파트리스 바르, 외젠 폴리아코프가 원작에 보다 충실하게 재안무한 버전인데, 프랑스 발레 특유의 ‘우아’와 ‘기품’이 키워드다.

“밝고 명랑하고 활기찬 1막과 영적으로 극도로 차분한 2막을 연기하는 것은 정서적으로 무척 힘듭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힘든 것은 고난도의 기술을 연출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현재 POB에서 지젤 역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정평난 에투알 도로테 질베르는 지젤의 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2막에서는 우선 발놀림부터 달라야 합니다. 절대적으로 바닥과의 마찰음을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최대한 발 관절을 유연하게 움직이죠. 그래야 소음 없이 천상의 유령이 될 수 있답니다. 거기에 덧붙여 상체와 하체가 각기 다른 에너지를 만들어 내야 해요. 다리를 빠르게 움직이면서 팔은 파도를 타는 듯 흘러야 합니다.”

우아하고 기품 있는 프랑스 스타일을 표현하기 위해 얼마나 섬세하게 발레기술을 보여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에투알 대대로 이어온 전통이다. 은퇴를 2년여 앞둔 질베르는 이미 갈라공연으로 몇 차례 내한하기도 했는데, 이번 무대에서는 기욤 디옵과 호흡을 맞춘다. 그 외에도 미리암 울드 브람, 레오노르 볼락, 제르망 루베, 폴 마르크 등 POB 간판스타가 총출동 하니 프랑스 전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귀한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최고(最古)와 최고(最高)라는 명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올해 개교 300주년을 맞는 파리오페라발레학교 출신이 아니면 입단 가능성이 거의 없는 POB에 첫 발을 디딘 한국인은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재직 중인 김용걸 교수다. 2021년 동양인 최초로 에투알에 등극해 고국에 큰 영광을 안겨준 박세은이 출산 때문에 이번 무대에 서지 못하는 게 아쉬움이다. 대신 지난해 ‘쉬제(솔리스트)’ 자리에 오른 강호현을 만나볼 수 있다.

‘지젤’은 천만번 보아도 아름다운 발레다. 첫 눈에 사랑에 빠진 지젤과 알브레히트가 데이지 꽃잎을 따며 사랑을 점치는 아기자기한 장면에서 배신과 광란의 춤으로 이어지는 변화무쌍한 드라마 속에 발레의 어려운 기술을 총망라하고 있어 볼거리도 넘친다. 가장 집중해야 할 관전 포인트는 1막의 하이라이트 ‘지젤 실성’ 장면이다. 알브레히트의 배신을 깨닫고 광란과 죽음으로 치닫는 지젤의 연기와 춤에 깃든 ‘발레 종가’만의 비법은 무얼까. 푸른 조명 아래 펼쳐지는 2막 숲 속 장면도 놓칠 수 없다. 다른 윌리들에게서 알브레히트의 생명을 구하는 ‘지젤 베리에이션’을 숨죽이고 집중해야 한다. 하얀 모슬린 천의 치마가 공기 중에서 하늘거리며 퍼질 때, 지젤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게 된다. 중력을 거스르며 가볍게 날아오르는 듯한 환각이야 말로 프랑스 낭만발레의 정수다.

장인주 무용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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