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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피해 韓귀화 시리아인들…생사넘은 친구들 지진에 잃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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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아다나에 사는 라연우씨의 가족은 지난 6일 시작된 강진으로 집을 잃고 체육관에 마련된 대피소로 대피했다. 라씨의 가족들은 "걱정하지 말라"며 라씨에게 웃는 사진을 보냈다고 한다. 사진 라연우씨

튀르키예 아다나에 사는 라연우씨의 가족은 지난 6일 시작된 강진으로 집을 잃고 체육관에 마련된 대피소로 대피했다. 라씨의 가족들은 "걱정하지 말라"며 라씨에게 웃는 사진을 보냈다고 한다. 사진 라연우씨

“가족들 누구도 연락이 안되더라고요. 지진 뉴스는 계속 나오는데….”
10일 만난 라연우(30·시리아 이름 아메드)씨는 눈물을 글썽였다. 규모 7.8의 강진이 튀르키예 남부를 강타한 지난 6일 밤(한국시각)을 떠올리면서였다. 그는 3년 전 시리아 국적을 버리고 한국에 귀화했다. 가족들은 튀르키예에 살고 있다. 뉴스에선 튀르키예에서 지진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현지의 가족들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자에도 답이 없었다. 라씨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기도뿐이었다. 휴대전화를 꼭 쥔 채 기도하길 두어 시간, 메신저 알람이 울렸다. 동생이었다. 동생은 “건물에 금이 가서 다들 정신없이 뛰쳐나왔다. 잠옷 바람으로 대피소로 가고 있다”고 했다. 라씨는 “연락이 닿기까지 그 짧은 시간 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오갔다”며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라씨 가족은 내전을 피해 고향을 떠난 피난민이다. 시리아는 2011년 민주화 시위가 도화선이 돼 내전이 시작됐고, 전 국토가 전란에 휩싸였다. 민간인 사망자가 속출하며 수백만 명이 피난길에 올랐다. 징집대상이 된 라씨도 2012년 튀르키예를 거쳐 지인이 있던 한국행을 택했다. 2년쯤 뒤 그의 부모와 동생들도 국경을 넘어 튀르키예 아다나로 이주했다. 내전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이산가족이 됐지만, “평화를 되찾으면 다시 고향 땅에 돌아갈 수 있다”며 서로를 다독였다고 한다. 라씨는 “내전이 12년째 이어지고 있지만 저는 한국으로, 다른 동생들은 튀르키예로 귀화하면서 그나마 형편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튀르키예 아다나에 사는 라연우씨의 가족은 지난 6일 시작된 강진으로 집을 잃고 체육관에 마련된 대피소로 대피했다. 사진 라연우씨

튀르키예 아다나에 사는 라연우씨의 가족은 지난 6일 시작된 강진으로 집을 잃고 체육관에 마련된 대피소로 대피했다. 사진 라연우씨

하지만 지진은 라씨 가족을 다시 궁지로 몰았다. 튀르키예 정부와 외신 등에 따르면 튀르키예 남동부와 시리아 북서부에서 발생한 강진으로 10일 기준 최소 2만 명이 사망했고, 건물 5700채 이상이 무너졌다. 라씨 가족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살던 아파트는 붕괴 직전이다. 집을 잃고 대피소에서 불안에 떠는 가족들 때문에 라씨도 애가 탄다. 그는 “이리저리 긁어모아서 200만원을 보냈지만, 얼마 못 갈 것 같다”며 “가족들이 ‘괜찮다. 걱정하지 말라’면서 웃는 사진을 보내주지만, 전 재산을 잃은 상황이라 앞으로가 더 막막하다”고 말했다.

타지 생활의 힘이던 고향 친구 3명, 모두 잃어

압둘와합씨의 가족들은 시리아 내전을 피해 튀르키예로 이주했다. 사진은 2014년 시리아 국경을 넘기 전 압둘와합씨와 가족들의 모습. 사진 압둘와합씨

압둘와합씨의 가족들은 시리아 내전을 피해 튀르키예로 이주했다. 사진은 2014년 시리아 국경을 넘기 전 압둘와합씨와 가족들의 모습. 사진 압둘와합씨

한국에 귀화한 시리아인 압둘와합(39)씨는 지진으로 고향 친구 3명을 한꺼번에 잃었다. 시리아 라카시에 살던 그와 친구들은 내전을 피해 뿔뿔이 흩어졌다. 압둘와합씨는 2009년 한국으로, 다른 친구들은 2014년부터 하나둘 국경을 넘어 튀르키예 가지엔테프 등지로 이주했다. 난민으로 맞은 타향살이는 녹록지 않았다. 시리아에서 변호사였지만, 타지에선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하루하루 불안했지만, 그때마다 고향 친구들이 힘이 됐다. “언젠간 고향에서 만나자”며 메신저로 서로 응원했다. 하지만 재회의 희망도 지진으로 물거품이 됐다. 무너진 건물 속에서 친구 3명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사망 이틀 뒤 숨진 친구의 지인을 통해 부고가 전해졌다. 압둘와합씨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고 했다. 그는 “일가족이 모두 사망한 친구도 있었다. 타지에서 힘겹게 살아가면서도 다시 만날 날만 기약하며 희망을 가졌는데 황망하다”며 눈시울을 훔쳤다.

“고국 돕겠다”며 귀국하는 튀르키예·시리아인

피해 복구를 돕기 위해 한국에서 고국으로 돌아가는 튀르키예·시리아인도 늘고 있다. 1년 전 한국에 온 튀르키예 유학생 하산(가명)도 그중 하나다. 최근 고국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하산의 가족과 친구들은 다행히 큰 화를 면했지만, 계속되는 여진 때문에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라고 했다. 지난 8일 만난 하산은 “ 대학교 개강이 코앞이지만 가족들 얼굴이 어른거려서 견딜 수가 없다”며 “힘든 일은 겪은 이들을 위해 고국에서 할 수 있는 걸 찾아보려 한다”고 말했다.

법무부는 지진 피해국인 튀르키예·시리아 국민의 출국 절차를 간소화하는 한시적 특별조치를 시행한다고 10일 밝혔다. 두 나라 국적의 불법체류 외국인도 출국을 희망하면 다음 달 10일까지 당일 공항이나 항만에서 자진신고 후 떠날 수 있다. 출국 3일 전 사전신고하게 되어있는 규정을 임시로 완화한 것이다. 법무부 관계자는 “피해 국민이 본국으로 가 가족들의 생사 확인 및 피해 복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취지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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