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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용수의 평양, 평양사람들

베트남에 있는 북한군 묘비…북, 월맹과 합의 1년 전 참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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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베트남 전쟁과 우크라이나 전쟁

정용수 통일문화연구소장

정용수 통일문화연구소장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입’으로 불리는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지난달 27일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한 입장을 냈다. 우크라이나에 최신형 M1 에이브럼스 전차(탱크) 31대를 지원키로 한 미국의 결정을 비난하는 내용이다. “미국과 서방이 지원하는 그 어떤 무장장비도 파철 더미가 될 것”이라고 저주한 김여정은 담화 말미에 “우리는 국가의 존엄과 명예, 나라의 자주권과 안전을 수호하기 위한 싸움에 나선 로씨야(러시아) 군대와 인민과 언제나 한 전호(참호)에 서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2019년 2월 2차 북·미 정상회담(하노이) 결렬 이후 줄곧 한국 때리기에 집중하던 북한이 돌연 미국에 화살을 겨눈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김여정이 러시아를 편들겠다고 한 대목은 앞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더 큰 역할을 하겠다는 뜻일 수도 있다. 탄약 부족을 겪는 러시아에 북한이 ‘은밀하게’ 지원하고 있다는 미국의 발표도 이미 나온 마당이다.

베트남전 참전에 함구하던 북한, 2019년 “27명 전사자 발생”
공군교관·조종사·심리전 요원·땅굴 전문가 등 300여 명 파병
하노이 인근의 북한군 묘지, 유해 송환 후 비석 14개만 남아
김여정 “러시아와 함께할 것”… 베트남전 ‘은밀한 거래’ 떠올라

“조선인민군 간부 14명 영면”

베트남 하노이에서 북동쪽으로 60여㎞ 떨어진 박장성의 북한군 묘지. 북한은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전사한 14명의 유해를 2002년 9월 봉환했고, 현재는 비석만 남았다. 정용수 기자

베트남 하노이에서 북동쪽으로 60여㎞ 떨어진 박장성의 북한군 묘지. 북한은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전사한 14명의 유해를 2002년 9월 봉환했고, 현재는 비석만 남았다. 정용수 기자

중앙일보는 지난달 재단법인 한반도평화만들기(이사장 홍석현 중앙홀딩스 회장)와 공동으로 ‘한-베트남 미래대화’를 베트남 현지에서 개최했다. 한국의 청년·대학생 20명이 베트남 국립외교아카데미 학생들과 간담회를 하고, 분단과 통일의 현장을 답사하고 토론하는 일정이었다. 지난달 18일 둘째 날 행사로 하노이에서 60㎞ 떨어진 박장성 랑장현 탄탄리의 북한군 묘지를 방문했다. 베트남 전쟁(월남전)에서 전사한 북한군 14명의 묘비가 있는 곳이다.

자원봉사로 묘지를 관리한다는 쯔엉 반 쩌우(78)씨가 굳게 닫힌 묘지 입구의 철문을 열어줬다. 쯔엉씨가 가끔 향을 피우기 위해 찾을 때 말고는 철문을 열 일이 없다고 했다. 철문 안으로 들어서니 20m가량 보도블록이 깔린 길이 나 있었다. 양옆에 심은 나무의 가지가 무성하게 뻗어 있었다. 길 끝에는 이끼가 낀 시멘트 계단 9개를 올라서자 기둥과 지붕만 있는 정자 형태의 구조물 안에 비석들이 있었다. 베트남어로 ‘조선 인민군 부대 14명의 간부가 영면해 있다’는 문구가 적힌 큰 비석 뒤로 한글 묘비가 두 줄로 서 있는 모습이다.

앞줄에 평양미술대학 1기 졸업생으로 6·25 전쟁 당시 비행학교에 입학해 조종사가 된 임장환(비행 교관으로 월남전 참전)과 차순해·이도인·신달호·김원환(오른쪽부터) 등 다섯 명의 이름이 비석에 쓰여 있었다. 또 뒷줄엔 김광욱·이동수·이창일·박종준·김태준·김경우·김기환·원홍상·임춘건 등의 비석도 세워졌다.

붉은 별과 ‘렬사’(열사)라는 글씨가 새겨진 묘비에 망자의 이름, 출생일, 사망일, 출생지가 적혀 있었다. 쩌우씨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이 끝난 뒤 이들의 유해를 수습해 풍수가 좋다는 이 지역에 묻었다. 그런데 2002년 북한이 유해를 모두 봉환해 지금은 유해는 없이 묘비만 있다고 했다.(현재 조국해방전쟁참전열사묘에 안장)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 때 김 위원장이 이곳을 방문할 것으로 관측한 서방 언론이 찾아 보도한 적이 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북한군 묘지를 찾지 않았고, 이후 관심에서 멀어졌다.

북-월맹 파병 합의 전에 전사자?

북한은 우방인 북베트남(월맹)에 파병했다는 사실을 공개한 적이 없다. 2002년 9월 김양점 당시 인민무력부(현 국방성) 부부장이 방문해 유해를 가져가면서 묘지의 존재가 처음 알려졌다. 전쟁 당시엔 공군 교관, 조종사, 심리전 및 땅굴 건설을 위한 공병부대 등을 파병했다는 소문만 있었다.

북한은 40년 가까이 지난 2002년에 베트남전 파병 사실을 처음 인정했지만 파병 규모 등 자세한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2019년 3월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가 베트남전에서 북한군 27명이 전사하는 등 “윁남(베트남) 인민들을 피로써 도와주고 사심 없이 지원했다”고 보도한 정도다.

북한의 베트남 파병 상황을 밝혀낸 것으로 인용되는 한 연구가 있다. 미 싱크탱크 우드로 윌슨 센터가 2011년 펴낸 ‘베트남 상공의 북한군 조종사(North Korean Pilot in the Skies over Vietnam)’라는 보고서다. 1966년 9월 개최된 북베트남군 중앙군사위원회 문건을 토대로 작성됐다. 이에 따르면 최광 당시 북한 인민군 총참모장과 반 티안 둥 북베트남 참모총장이 일주일 동안 회담한 뒤 6개항에 합의했다. 10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북한이 미그-17 전투기 중대(전투기 10대로 구성)와 조종사를 파병하고, 북베트남이 공군부대를 갖추면 66년 말부터 67년 초까지 북한의 공군 부대를 추가 파병한다는 내용 등이다.

북한의 베트남전 파병과 관련한 공식 자료가 없다 보니 이 보고서의 내용을 북한군 파병 시점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파병 규모는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북한이 조종사 87명과 교관, 심리전단 요원, 땅굴 굴착을 위한 공병 등 300명의 병력과 실탄, 군복 등 대규모 군수 지원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보다 1년 앞선 65년에 북한이 이미 파병했던 사실이 이번 묘지 방문에서 확인됐다. 묘비엔 14명 중 12명이 미군의 대공세가 있었던 67년에, 1명(김기환)은 68년에 전사했다고 돼 있다. 한데 평남 숙천 출신이라는 원홍상의 묘비엔 ‘1965년 9월 24일 희생’이라고 적혀 있었다. 북한이 공식 파병했다는 시점보다 1년 앞선다. 베트남 전쟁 도중인 64년 베트남을 방문한 김일성 북한 주석이 호치민 베트남 주석에게 파병을 약속하고 ‘은밀히’ 파병했을 것으로 보인다. 원홍상의 묘비가 이를 뒷받침한다.

원홍상 묘비의 사진을 살펴보면서 김여정이 “로씨야 지원”을 언급한 건 이미 러시아를 지원하고 있다고 고백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파병하진 않았더라도 외교적, 또는 무기 지원(판매) 등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미 깊숙이 개입한 건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해봤다.

베트남 사례에서 보듯 북한은 한국과 달리 파병 사실을 여간해선 공개하지 않는다. 대외적으로 평화를 중시한다는 이미지를 강조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은 국방력 강화가 미국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자위권 차원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북한은 지난 8일 심야 열병식에서 전술핵부대와 고체연료를 적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선보였다. 전자는 한국을, 후자는 미국을 겨냥한 것이다. 각종 포와 단거리 미사일은 어쩌면 김여정의 “로씨야” 편들기에 활용되고 있을지 모른다. 베트남 북한군 묘비를 방문하고 돌아온 직후 맞이한 북한군 열병식을 보며 북한의 ‘위험한 거래’가 재연될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스쳤다.

김정일은 조던, 김정은은 로드먼…북한 최고지도자 부자의 NBA 사랑

북한이 국제친전선람관에 전시했다고 공개한 미국 프로농구(NBA) 선수 출신 데니스 로드먼의 사인볼. [사진 인터넷 ‘내나라’ ‘조선의 출판물’ 캡처]

북한이 국제친전선람관에 전시했다고 공개한 미국 프로농구(NBA) 선수 출신 데니스 로드먼의 사인볼. [사진 인터넷 ‘내나라’ ‘조선의 출판물’ 캡처]

프로 스포츠는 자본주의의 꽃으로 불린다. 선수를 사고팔고, 돈으로 실력을 평가받는 경우가 많아서다. 미국 프로농구(NBA)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자본주의를 극도로 경계하는 북한이 최고지도자가 선물 받은 미국의 대표적인 프로농구 선수 사인볼을 전시하고, 최근 화보를 만들어 북한 주민에게 공개했다.

북한의 대외선전 매체인 ‘조선의 출판물’은 최근 외국문출판사가 지난해 말 제작한 화보 『국제친선전람관-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께 드린 선물』을 공개했다. 국제친선전람관은 해외 인사들이 김일성·김정일·김정은에게 보낸 선물을 모아 놓은 전시관이다. 화보는 김정일(2011년 사망) 국방위원장이 받은 선물 일부를 아시아·유럽·아프리카·아메리카·국제기구 등 지역별로 나눈 111쪽 분량이다. 북한은 “170여 나라의 인사들이 보낸 4만여 점의 일부를 편집했다”고 소개했다.

북한이 국제친전선람관에 전시했다고 공개한 미국 프로농구(NBA) 선수 출신 마이클 조던의 사인볼(왼쪽부터). [사진 인터넷 ‘내나라’ ‘조선의 출판물’ 캡처]

북한이 국제친전선람관에 전시했다고 공개한 미국 프로농구(NBA) 선수 출신 마이클 조던의 사인볼(왼쪽부터). [사진 인터넷 ‘내나라’ ‘조선의 출판물’ 캡처]

화보에선 미국의 스포츠용품 회사인 윌슨(WILSON)사의 로고와 사인이 선명한 농구공 사진이 눈길을 끈다. 북한은 “2000년 10월 미합중국 국무장관 매덜레인 케이 알브라이트는 롱구(농구)공을 선물로 드리였다”는 사진설명도 곁들였다. 당시 북한을 방문한 고(故)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1990년대 NBA의 전설적 선수였던 마이클 조던의 사인을 받아 김정일 위원장에게 선물한 농구공이다.

북한은 대외선전 매체인 ‘내나라’ 홈페이지의 국제친선전람관 김정은 국무위원장 코너에 조던의 팀 동료였던 데니스 로드먼이 2013년 9월 방북해 선물한 사인볼도 소개했다. 김정일과 김정은은 농구광으로 유명하다. 전영선 북한연구학회장은 “북한은 묘향산에 국제친선전람관을 지어 해외 인사들의 선물을 전시하고, 북한 주민들에게 ‘국제적으로 자신들의 지도자를 칭송하고 있다’는 식으로 교육하고 있다”며 “NBA가 자본주의의 꽃이란 사실을 모르는 북한 주민들에게 조던과 로드먼도 김정일 부자에게 선물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용수 통일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