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정운찬 칼럼

신뢰의 열매는 하루아침에 열리지 않는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

경제가 흔들린다. 2023년 1월, 새해 첫 달부터 무역적자가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경제를 이끌어온 수출이, 또 수출을 주도해온 반도체가 제 역할을 못한 데다 수입 에너지 비용이 너무 높아졌기 때문이다. 정치는 극한투쟁으로 치닫고 있다. 경제 위기 앞에서 혼연일체가 돼도 쉽지 않은데 매사에 생산적인 논의는 전무한 채 싸움만 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한국 사회의 자화상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더니 윤석열 대통령이 큰일을 해냈다. 지난달 아랍에미리트(UAE)를 방문하고 300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약속받았다.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다. 물론 약속이란 게 업무협약(MOU) 수준이라 결과는 두고 보아야 하지만 나는 그 약속이 꼭 지켜지리라고 믿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약속을 지키는 대한민국에 대한 신뢰로 투자를 결정했다”는 UAE 대통령 모하메드 빈 자이드 알 나하얀의 말에 성사의 비밀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UAE의 300억 달러 투자 낭보는
역대 정부가 쌓아온 믿음의 결실
공정·상식 내걸고 집권한 윤 정부
개방·소통으로 국민 신뢰 얻어야

약속이든 조약이든, 국가 간의 첨예한 이해가 달린 거래는 말이나 글만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해관계가 일치해야 하고, 상호 신뢰가 전제돼야 한다. 모하메드 대통령의 언급은 우리 국민끼리도, 특히 정치인들 말이라면 신뢰가 떨어진 마당에 우리나라가 국가 차원에서 외국의 전폭적 신뢰를 얻어냈다는 점에서 여간 반가운 게 아니다. 신뢰는 하루아침에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 끊임없는 노력의 축적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이번 투자유치를 통해 우리가 다시금 깨달은 교훈이다.

한국과 UAE의 긴밀한 관계는 이명박 대통령이 프랑스와의 경쟁 끝에 바라카 원전을 수주한 2009년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전 발전소 경비를 위해 군대까지 파견해야 하느냐는 비판이 있었으나 이 대통령은 우리의 원전 기술에 대한 믿음과 중동 진출의 절대적 필요성을 바탕으로 끝까지 밀어붙였다. 이 과정에서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에게 배운 특유의 과감한 기업가 정신도 한몫했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2013년 UAE와 상호군수지원협정(MLSA)을 체결하여 양국 관계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 탈원전 기조 속에서도 문재인 대통령은 바라카 원전 1호기 준공식에 참석하여 양국 관계를 돈독히 유지했다. 국내에서는 탈원전을 추구하면서 외국에 원전을 수출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라는 지적을 받으면서도 말이다. 결국 정권을 초월한 국가적 신뢰 구축이 이번 대규모 투자로 이어졌다. 그러나 연원을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번 투자유치는 1970~80년대에 한국의 노동자들이 열사(熱沙)의 땅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 밤낮으로 굵은 땀방울을 쏟으며 한편으로는 중동의 경제개발을 돕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경제성장에 크게 기여한 덕분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 앞에 전개되는 일들은 우리가 현재 펼치는 정책들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지만, 과거 일어난 일들의 성과이기도 하다. 동시에 오늘 일어나는 일들은 또한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규정하기도 한다. 바로 여기에 UAE 투자 유치의 두 번째 교훈이 있다. 정부는 국제사회에서의 신뢰와 마찬가지로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대국민 약속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엄중한 일인지 새삼 깨우쳐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이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달라는 위임을 받은 정부는 국민과의 약속을 이행할 엄중한 의무가 있다. 여기서 ‘국민’은 대통령에게 한 표를 던진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치적 선호를 가지고 각자 우리 사회의 균형추 역할을 하는 모든 시민을 의미한다. 아쉽게도 대한민국 정부는 상당 기간 동안 대통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만 생각한다는 의심이 들 정도로 정치적 이해관계에 민감했다. 서로 다른 국민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정치의 대의와 거리가 먼 게 사실이었다. 그러다 보니 정부는 국민들로부터 ‘반쪽’ 신뢰밖에 얻을 수 없었다. 이는 고스란히 정권에 부담으로 작용하여 국정운영의 비효율성을 초래하고, 나머지 반쪽 국민은 불행한 결과를 낳았다.

윤석열 정부도 이런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늘부터라도 윤 대통령은 후보 시절 힘주어 말했던 공정과 상식을 행정의 원칙으로 삼아 좀 더 투명하고 개방적으로 국정을 운영해나가야 한다. 따뜻한 가슴과 열린 마음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반대하는 국민들과도 인내심을 가지고 소통하여 공감대를 넓히는 게 민주정부의 기본자세다. 온 국민이 행복한 나라, 더불어 잘 사는 사회로 가는 길은 멀리 있지 않다. 국민이 요구하기 전에 살피고, 작은 소리를 크게 들어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다.

3·1 독립운동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리는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께서 늘 강조한 말씀을 윤석열 정부에게 전하고 싶다. “정직하라”, “약자에게는 비둘기 같은 자애로움으로, 강자에게는 호랑이 같은 엄격함으로 대하라.”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