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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지영의 문화난장

유학자도 명절에 처가부터 갔다는데…'꼰대' 유교의 반성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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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지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지영 논설위원

이지영 논설위원

또 한 번의 명절이 지나갔다. 집합 인원 제한이 없는 3년 만의 설이었다. 스트레스ㆍ증후군 등을 촉발해 가정불화와 갈등, 폭력 사건까지 불거지곤 했던 이전 설에 비해 비교적 순탄하게 넘어간 모양새다.

전국 유림의 모임, 성균관유도회총본부의 최영갑(60) 회장은 명절을 맞을 때마다 긴장이 된다. “변하지 않으면 없어진다”는 위기의식이 커서다.

차례 간소화 조치 큰 호응
최영갑 유도회장의 파격

전 없어도, 배꼽인사 OK

“안 변하면 소멸” 위기감

카카오TV 드라마 ‘며느라기’의 명절 풍경. 남녀 불평등한 행태가 적나라하다. [방송캡처]

카카오TV 드라마 ‘며느라기’의 명절 풍경. 남녀 불평등한 행태가 적나라하다. [방송캡처]

그는 지난해 6월 회장에 취임한 이래 두 번의 명절을 지내며 두 차례  ‘히트 상품’을 냈다. 지난해 추석 전 기자회견을 열어 “차례상에 전 안 올려도 된다”고 선언한 데 이어 올 설을 앞두고는 절하는 법을 알려주며 ‘배꼽 인사’란 키워드를 뽑아내 화제가 됐다. 모두 그가 위원장을 맡은 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가 도출해낸 성과다.

조선 전기 예문관 직제학 등을 지낸 연촌 최덕지(1384∼1455) 선생의 24세손인 그는 뿌리 깊은 유학자다. 성균관 교육원장으로 있던 2020년 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를 만들어 고유(告由ㆍ가묘나 종묘에 사유를 고하는 의식), 석전(釋奠ㆍ유교 성현들에게 올리는 제사) 등 유교 의식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에 나섰다.

그런 그가 명절 간소화에 앞장서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 설 귀향 행렬이 막 시작될 무렵인 지난 20일 오후 서울 명륜동 유림회관에서 그를 만났다.
 “우리가 너무 늦었구나 싶더라.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 것이다. 안일하고 둔감했다. 시집살이가 괴로운 일부 여성들의 불만이겠거니 생각했는데, 60대 이하 세대에선 남성들도 제사ㆍ차례 등에서 주도권을 쥐지 않으려 했다. 그냥 부모 살아계시는 동안만 그 뜻 거스르지 말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 놀랐다.”

명절에 전 부치는 수고를 그만해도 된다는 파격적 권고는 유교의 ‘꼰대’ 이미지를 타개하기 위한 전략적 승부수였다. “한방 터뜨리기에 차례상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란 그의 예상대로 반향이 컸다.

근거는 유교 경전에서 찾았다. 『예기』의 ‘악기’에 “큰 예법은 간략해야 한다(大禮必簡)”고 명시돼 있다는 것이다. 또 조선시대 예학의 대가 사계 김장생도 『사계전서』에  “기름진 음식을 써서 제사 지내는 것은 예가 아니다”라고 기록했다 하고, 퇴계 이황과 명재 윤증도 기름으로 조리한 유밀과와 전을 제사상에 올리지 말라는 유훈을 남겼다 했다. 퇴계 종가 등의 차례상은 이미 간결하게 차려지고 있었다.

지난 16일 ‘설 차례 간소화 기자회견’에서 발언하는 최영갑 성균관유도회총본부 회장. [연합뉴스]

지난 16일 ‘설 차례 간소화 기자회견’에서 발언하는 최영갑 성균관유도회총본부 회장. [연합뉴스]

이렇게 잘 알고 있는 유교 전문가들이 명절 때마다 전 부치느라 허리가 휘는 이들의 고생을 그동안 지켜보고만 있었단 말인가. 최 회장은 “오랫동안 관행처럼 내려오던 예법을 바꾸지 못했다”는 걸 인정하면서 “늦은 감이 있어도 유교 의례를 바로잡는 일을 계속 연구하고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간소화 방침을 두고 유림 내 반발ㆍ논란은 없었나.
 “유교가 남녀 갈등, 세대 갈등의 주범 취급을 받고 있지만, 유교의 핵심은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예(禮)다. 유림도 명절 간소화에 적극적이다. 실제로 지난해 7월 실시한 차례 문화 관련 설문조사에서 ‘간소화’를 가장 필요한 개선점으로 꼽은 비율이 일반인(40.7%)보다 유림(41.8%)이 더 높았다.”

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의 다음 과제는 제례 연구다. 차례 의식보다 복잡한 제사 문화는 ‘투 트랙’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간소화 모델을 제시해 일반 대중의 부담은 덜어주면서, 전통 제례의 원형은 무형문화재ㆍ세계문화유산 형태로 국가 차원에서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교가 중국에서 들어왔지만 제사 문화는 우리만 계승하고 있다. 전국의 종가 중 제사를 전통 방식 그대로 지내는 집은 현재 10가구 정도밖에 안 된다.”

-제사 문화를 지켜야 할 이유가 뭔가.
 “유교에서 제사는 흉사(凶事)가 아니라 길사(吉事)다. 가족들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가지라는 게 제사의 본뜻이다. 가장 작은 공동체인 가족ㆍ가문의 단결하는 힘이 위기 때마다 발휘된 우리 사회 공동체 정신의 근간이 된다.”

그의 주장은 내내 상식적이고 합리적이었다. 내친김에 명절날 양가 방문 순서에 대한 질문도 했다. 명절에 남편 쪽 가족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문제는 밀리언셀러 『82년생 김지영』이나 드라마 ‘며느라기’ 등에서도 갈등 상황으로 다뤄진 바 있다.
 “성균관이 나서 어디부터 가라고 조언할 일은 아니다. 양가 부모 모두 자신의 부모라는 기본 정신을 갖고 부부가 협의해서 형편껏 하라. 나도 지난 추석엔 서울 처가부터 갔고, 이번 설엔 무안 본가부터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