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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전차에 놀란 박정희가 만들었다…K2흑표 할아버지의 퇴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반세기 가까이 현역 생활을 이어온 노장이 전역을 눈앞에 두고 있다. 최초 국산 조립 전차로 불리는 M48A3K와 M48A5K 얘기다. 2023년 1월 현재 M48A3K는 작전에서 모조리 빠진 뒤 퇴역을 앞둔 상태다. M48A5K는 아직 굴러다니고 있지만, 곧 형님인 M48A3K의 길을 따라갈 예정이다.

이들 전차는 심각한 노후화로 인해 잔존가치가 없다는 등 지금은 ‘뒷방 노인’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현재 국군 기갑전력의 토대를 마련한 공로만큼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미국의 M48 패튼을 개량한 한국형 전차 M48A3K. 디펜스타임즈

미국의 M48 패튼을 개량한 한국형 전차 M48A3K. 디펜스타임즈

6·25 북한 기갑전력에 트라우마…전차 개발의 꿈으로

1978년 4월 대한뉴스는 박정희 대통령의 시찰 장면과 함께 M48A3K와 M48A3K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고성능 국산 전차가 대량 생산단계에 들어가면서 우리나라는 자유진영에서 9번째로 전차 생산국이 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8년 4월 방위산업 공장을 시찰하면서 M48 패튼의 한국형 개량 전차를 들여다보고 있다. 뒤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KTV 대한뉴스 유튜브 캡처

박정희 대통령이 1978년 4월 방위산업 공장을 시찰하면서 M48 패튼의 한국형 개량 전차를 들여다보고 있다. 뒤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KTV 대한뉴스 유튜브 캡처

국산이라고 했지만, 국내 기술로 생산됐다기보다 국내 기술이 일부 담긴 ‘개조’ 또는 ‘개량’으로 보는 게 적절하다. 엄밀히 말하면 최초 국산 조립 전차인 셈이다.

한국이 전차 산업에 뛰어들었다는 의미로 여기엔 절박함이 작용했다. 결정적 계기는 1970년대 박 대통령이 미 정부로부터 입수한 북한의 전차 공장 위성사진이었다고 한다. 전차처럼 보이는 수많은 점은 설로 무성하던 북한 기갑전력의 우수성을 확인해줬다. 소련의 2세대 전차 T-62를 약 500대 들여온 북한은 이즈음 T-62를 토대로 ‘천마호’를 개발하고 있었다. 6·25 전쟁 때 북한 전차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서울을 사흘 만에 내준 뼈아픈 기억이 되살아났을 법도 했다.

정부는 미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M60 같은 2세대 전차를 국내에서 만들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이었다. 미국이 난색을 보이는 사이 정부는 서독의 레오파르트1에 눈길을 돌렸다. 예상치 못한 행보에 미국은 한국에 있는 M48 패튼 전차를 개량하자는 내용과 함께 3세대 전차 개발에 기술 지원도 제안했다.

베트남전 계기, 미국으로부터 받은 전차로 ‘한국형’ 개조

1950년대 생산된 1세대 전차 M48 패튼은 베트남전 병력 파병을 대가로 1966년부터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국군은 1970년대 중·후반 약 900대의 M48을 보유했다. 이를 일단 2세대 전차 수준으로 개조하면서 급한 불부터 꺼보자는 데 한·미는 뜻을 같이했다.

미국의 M48 패튼을 개량한 한국형 전차 M48A3K. 디펜스타임즈

미국의 M48 패튼을 개량한 한국형 전차 M48A3K. 디펜스타임즈

그렇게 기존 갖고 있던 M48 차체에 미국이 보낸 엔진, 포 등 부품을 새로 장착하는 작업이 이뤄졌다. M48의 개량형인 M48A3·A5처럼 가솔린 엔진은 디젤 엔진으로 교체돼 항속거리를 200~300㎞ 늘렸다.

주포의 경우 M48A3K는 90㎜를 유지했지만, M48A5K는 105㎜로 몸집을 키웠다. 화력 증강이라는 개량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90㎜ 포탄 재고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궤도를 보호하는 사이드스커트가 달리거나 측풍 감지기 등 사격통제장치의 성능 개선이 이뤄진 건 당시 한국형 M48 개량형의 특징이었다. 이 때문에 이들 전차의 이름 끝엔 ‘K’가 붙었다.

일부는 창고로, 일부는 예비전력과 함께…조용한 은퇴 앞둬

이들 전차가 국군의 주력 전차이던 시기엔 850대 이상이 운용됐다. 그러다 3세대 전차가 등장하면서 전성기도 막을 내리게 됐다. 1987년과 2014년 각각 실전 배치된 K1 ‘88전차’와 K2 ‘흑표’ 전차가 M48A3K와 M48A5K의 자리를 대신했다.

M68 105㎜ 주포를 장착한 M48A5K 패튼. 퇴역할 시점을 넘겼음에도 여전히 국군의 주요 전력으로 활약 중이다. 국방부

M68 105㎜ 주포를 장착한 M48A5K 패튼. 퇴역할 시점을 넘겼음에도 여전히 국군의 주요 전력으로 활약 중이다. 국방부

M48A3K는 1990년대 후반 육군에서 해병대로 자리를 옮겼다가 지난해 모두 실전에서 물러났다. 현재 해병대 2사단에 약 40대가 보관돼 있다고 하는데, 지난해 10월 창고로 들어갔고 올 상반기 퇴역 절차를 밟을 것으로 보인다. 군 당국은 안보전시관 전시용 등 향후 활용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M48A5K는 여전히 현역이다. 비록 대부분 예비군이 주축인 동원사단으로 물러나 있는 모양새이지만 여전히 400여 대가 운용되고 있다. K1과 K2가 대전차전을 담당한다고 보면 보병을 지원하는 임무에선 아직 쓸 만하다는 게 군 안팎의 평가다. 유사시 고정포탑으로 북한 기갑 전력을 소모하는 역할로도 유용하다. 1~2년 내 K2가 추가 양산돼 배치되면 온전한 퇴역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 ‘최초’ 기록 K1·K2의 조상  

물론 1978년 개량된 이들 전차 중 일부는 1950년대 생산된 차체를 지니고 있으니 노후화 논란은 끊이질 않는다. 2011년엔 전차를 유지할 때 얻는 이익보다 연평균 정비 비용이 많이 들어, 잔존가치가 없다는 평가도 받았다.

지난해 9월 경기도 포천에 있는 승진과학화훈련장에서 육군이 대규모 기동화력 시범을 선보였다. K2 흑표전차가 기동하는 모습. 연합뉴스

지난해 9월 경기도 포천에 있는 승진과학화훈련장에서 육군이 대규모 기동화력 시범을 선보였다. K2 흑표전차가 기동하는 모습. 연합뉴스

그럼에도 K1와 K2가 얻은 ‘최초’ 기록을 떠올려보면 이들 노장의 무게감은 상당하다. 미국에서 개발된 K1은 국내 공장에서 생산된 첫 번째 전차이고, K2는 한국 기술로 개발과 생산이 모두 이뤄진 최초 전차다. K1의 아버지뻘, K2의 할아버지뻘 정도로 볼 수 있다. 안승범 디펜스타임즈 편집장은 “‘맨땅’과도 같던 우리나라 전차 개발 분야에서 M48 조립은 분기점이 됐다”며 “K1 생산 라인을 깔 수 있는 기반이 됐고, K2 개발로도 이어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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