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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기억] 설산에 핀 붉은 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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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3호 31면

사진가 성남훈의 ‘연화지정’ 시리즈. 동티베트, 2010년.

사진가 성남훈의 ‘연화지정’ 시리즈. 동티베트, 2010년.

‘시(詩)는 거리에 사는데, 어떤 시는 허술한 집 앞에서 잠시 인사를 나누고 자기들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몸에 묻어서 여기저기로 계속 퍼지는데, 그게 우리에게 조금 묻었다.’

미학자이자 비평가인 양효실은 사진가 성남훈의 사진 시리즈 ‘연화지정’에 대해 평 쓰기를 거절했다. “이미 사진이 다 말하고 있으므로, 더 할 말이 없다”는 이유였다. 위 문장은 그런 미학자가 “잔상이 계속 말을 걸어,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한 후에 쓴 글의 일부다.

나에게도 그 시가 조금 묻었던가. 요즘 같은 겨울이면, 성남훈의 ‘연화지정’이 떠오른다.

한때는 왕국이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캄’은 동티베트, 쓰촨성 깐쯔현이 터였다. 이곳에는 티베트불교의 불학원들이 모여 있는데, 4000m 고지의 구릉에 위치한 ‘아추가르 불학원’은 그중에서도 규모가 크고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아 신비롭게 여겨지던 곳이다.

불학원을 중심으로 계절에 한 번씩 주변 마을의 신도들이 모여 큰스님의 강연을 듣는 대법회가 열리고, 10월과 12월 사이에는 ‘100일 참선’이 이루어진다. 수천 명의 비구니들이 허허벌판에 널빤지와 붉은 천으로 직접 지은 일인용 움막을 거처 삼아 참선을 하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사진가 성남훈이 ‘금남의 땅’으로 알려진 이곳에 발을 들인 것은 2008년. 그는 고원의 풍경과 새하얀 들판에 새벽바람을 가르며 모여드는 행렬들을 원경으로, 비구니들의 움막을 근경으로 사진에 담았다. 얼음 박힌 볼과 맑은 눈망울, 그 얼굴 너머 진리를 열망하는 정신까지를 기어이 포착하려는 듯 카메라가 더는 들어갈 수 없을 만큼의 거리에서도 찍었다. 그리고 이 사진은 2009년 세계적 권위의 월드프레스포토(WPP) 포트레이트 부문 수상작이 되면서, 국내 사진가로는 유일하게 월드프레스포토 3회 수상이라는 작가의 이력을 완성했다.

눈발이 날리는 허허한 벌판 움막에 얼음 박힌 볼을 하고 앉아 있는 어린 비구니는, 그대로 겨울날 흰 설산에 핀 붉은 꽃이다. 어쩌면 사라진 캄 왕국처럼 더는 현실에 피지 않을지라도, 사진으로는 선연히 남아 보는 이를 돈오케 한다.

박미경 류가헌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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