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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경록의 은퇴와 투자

자산관리, 인출이 축적보다 어렵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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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

정초에 태백산에 올랐다가 무릎이 아파 2~3일 후유증을 겪었다. 나름 꾀를 낸다고 옆걸음으로 산에서 내려온 게 화근이 된 듯하다. 산은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가 위험하다. 실제로 하산 때 사망 사고가 잦다. 축적과 인출로 이루어진 생애자산관리도 올라가는 축적보다 내려오는 인출에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생애자산관리라는 산을 오를 때는 열심히 일하면 된다. 직장에서 높은 소득을 받고 오래 일자리에 머무르면 상당 부분 자산은 축적된다. 생활비가 증가해도 이에 상응해서 근로소득도 오르기에 구매력 걱정을 안 해도 된다. 자산 운용 수익률에 따라 축적 규모가 달라질 수 있지만 특별히 재테크를 잘한 일부를 제외하면 그 차가 크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은 국민연금은 국가가 관리해주고 퇴직연금 DB(확정급여형)는 임금상승률만큼 퇴직급여가 증가하기 때문에 집을 구매하는 것을 제외하고 나면 본인이 직접 운용해야 하는 자산은 많지 않다.

베이비부머 세대 퇴직 본격화
물가·수명·수익률 모두 불확실
잘못된 인출로 노후불안 커져
금융기관·당국의 역할 필수적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하지만, 퇴직하고 축적한 자산에서 은퇴소득을 만들 때는 축적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가 생겨난다. 생애자산관리라는 산에서 내려올 때 맞닥치는 위험들이다. 우선, 근로소득이 없다 보니 노후 생활비가 오를 때 이에 연동해서 오르는 소득이 없다. 국민연금이 있지만 생활비에 많이 못 미친다. 국민연금연구원의 노후준비실태조사에 따르면 2005년부터 매년 생활비는 4% 올랐다. 18년 후면 생활비가 두 배가 된다는 뜻이다. 은퇴소득이 이를 따라갈 수 있을까. 이를 따라가려면 투자 자산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얼마를 보유해야 할지 어떤 종류의 금융상품을 보유해야 은퇴소득의 구매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막연하다.

이보다 더 어려운 게 몇 년치 은퇴소득을 만들어야 하는지 문제다. 현재 생명표 기준으로 60세 남성은 75세 이전에 사망할 확률이 22%이며, 또한 91세까지 생존할 확률도 21%다. 60세 친구 5명 중 1명은 75세 이전에 죽고, 5명 중 1명은 91세까지 살아 있는 셈이다. 은퇴소득을 91세까지 계획했는데 75세 이전에 사망할 확률과 75세까지 계획했는데 91세까지 생존할 확률이 같다면 어느 수명 장단에 맞추어야 할지 난감하다. 평균 수명에 맞춘다고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저수지 깊이가 평균 1m라고 해서 안전한 것이 아닌 거나 마찬가지다. 이를 해결해주는 게 일찍 죽은 사람이 오래 산 사람을 보조해주는 종신연금이다. 하지만, 종신연금은 일단 목돈으로 가입하면 중간에 찾을 수 없는 단점이 있다.

마지막으로, 수익률 순서에 따른 운칠기삼(運七技三) 영역이다. 투자를 통해 은퇴소득을 만들 경우 퇴직 직후에 주식 수익률이 높았는지 아니면 퇴직 후반에 좋았는지에 따라 은퇴소득의 크기와 지속 기간이 달라진다. 내가 퇴직할 때 주식시장이 몇 년 동안 좋지 않으면 그걸로 퇴직 후 전체 은퇴소득이 줄어든다. 퇴직 직후 자산 규모가 클 때 수익률이 높아야 하는데 오히려 은퇴소득을 인출하기 위해 싼 가격에 자산을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운 좋게도 퇴직 후 10년간 주식 수익률이 높으면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다. 그런데 주식시장은 전망할 수도 없을뿐더러 나의 퇴직 연령을 주식시장 호황에 일치시키기는 더 어렵다.

이런 불확실성 때문에 제도도 오락가락한다. 영국은 퇴직연금 DC(확정기여형)를 모두 종신연금으로 받게 했지만, 2015년부터 연금자유화를 실시하면서 개인들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겼다. 저금리가 지속하면서 안전 위주의 정책을 바꾼 것이다. 반면에 미국은 은퇴소득을 개인의 자유에 맡기고 있으나 2014년에 퇴직연금에 적격장수보험을 도입했고 2019년 ‘시큐어(SECURE)법’ 제정을 계기로 퇴직연금 계좌에서 종신연금을 편입하는 걸림돌을 제거했다.

퇴직하게 되면 오랜 기간의 자산 축적이 끝난다. 산의 정상에 오른 기분이다. 이제 할 일 다 했고 축적한 자산에서 필요할 때 돈만 인출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전혀 그렇지 않다. 은퇴소득을 만들 때부터 자산관리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인출이야말로 자산관리의 진검승부라 할 수 있다.

베이비부머가 대량 퇴직하면서 인출사회가 도래하고 있다. 그 불확실성을 개인에게 모두 감당케 하지 말고 금융상품, 솔루션, 제도 등에서 금융회사와 당국의 역할이 필요하다.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