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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한반도 전쟁 나면 중국은 참전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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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로 선출된 김정일 당시 조선노동당 중앙위 비서가 1983년 6월 베이징을 방문해 덩샤오핑을 만나고 있다. 북한의 후계자가 중국 최고지도자와 신고식을 겸해 인사를 하는 자리였다. [사진 출처=중국 세계지식출판사가 2009년 10월 발간한 ‘중조 수교 60주년 사진집’]

1980년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로 선출된 김정일 당시 조선노동당 중앙위 비서가 1983년 6월 베이징을 방문해 덩샤오핑을 만나고 있다. 북한의 후계자가 중국 최고지도자와 신고식을 겸해 인사를 하는 자리였다. [사진 출처=중국 세계지식출판사가 2009년 10월 발간한 ‘중조 수교 60주년 사진집’]

중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자동 군사 개입할까? 북‧중 관계에서 오래 묵은 궁금증이다. 북‧중은 1961년 7월 11일 북‧중 우호 협조 및 상호원조에 관한 조약(이하 북‧중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앞서 북‧러는 1961년 7월 6일 같은 내용의 조약(이하 북‧러 조약)을 맺었다. 차이점이 하나 있다. 북‧중 조약은 수정 또는 폐기하려는 쌍방 간의 합의가 없으면 계속 효력이 유지된다. 반면 북‧러 조약은 유효기간이 10년이며 폐기하려는 합의가 없으면 5년마다 한 차례씩 연장할 수 있다.

두 조약 모두 어떤 국가 또는 연합으로부터 무력 침공을 당하면 자동 군사 개입하는 조항이 포함됐다. 하지만 현재 북‧러 조약은 자동 군사 개입 조항이 빠져 있다. 북‧러는 한‧소 수교(1990년), 구소련의 붕괴 등으로 1995년 조약을 파기했다. 그러다 한반도 영향력 회복을 노린 러시아의 전략적 의도와 국제적 고립을 탈피하려는 북한의 필요성이 맞물리면서 2000년 2월 다시 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형식과 내용에서 1961년과 달랐다. 1961년은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흐루쇼프와 조약에 서명했다. 2000년은 이바노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해 백남순 북한 외무상과 체결했다. 서명자의 급이 낮아진 것이다. 그리고 조약의 최대 쟁점인 자동 군사 개입 조항을 삭제했다.

그 대신에 ①쌍방 중 한쪽에 침략당할 위기가 발생 ②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상황이 발생 ③협의와 협력이 불가피한 경우 쌍방은 즉각 접촉한다고 합의했다. ‘자동 군사 개입’이 삭제되고 ‘즉각 접촉’으로 대체한 것이다. 촌각을 다투는 전쟁 상황에서 ‘즉각 접촉’이 어떤 역할을 할지 모호하다. 신조약은 경제‧과학기술‧문화 분야 등의 협력이 주요 내용으로 구성됐다. 그래서인지 조약명도 과거 ‘우호 협조 및 상호원조에 관한 조약’에서 ‘친선, 선린 및 협조에 관한 조약’으로 바뀌었다. 과거보다 한발 뒤로 물러난 것이다.

그러나 북‧중 관계는 60년 넘게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의 북한에 대한 전략적 가치가 다른 것일까? 중국에도 러시아처럼 북‧중 조약의 수정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스인훙 중국 인민대 교수는 “한국전쟁에 중국의 참전은 명백한 착오다”,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개입하지 말아야” 등을 주장했다. 선지루 중국 사회과학원 세계정치연구소 연구원은 “조약의 존재가 북한이 오판할 수 있는 근거가 되므로 개정이 필요하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북한이 핵실험을 계속하자 중국 국민도 이에 동참하고 있다. 북한이 2013년 2월 제3차 핵실험을 하자 랴오닝성 선양 시민들은 북한 영사관 앞에서 ‘북한의 핵실험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이다’, ‘중국은 북한을 버려야 한다’ 등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중국 지도부는 공개적으로 북‧중 조약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중국 지도부인들 불만이 없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러시아처럼 결정하기도 어렵다. 한반도에서 모스크바는 멀지만, 베이징은 가깝다. 중국 지도자 가운데 자동 군사 개입에 대해 언급한 사람은 덩샤오핑이다. 1983년 6월 11일 일이다.

김정일이 1983년 6월 2일부터 12일까지 중국을 처음 방문했다. 당시 김정일은 조선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 비서국 비서였다. 덩샤오핑이 1년 전 1982년 4월 후야오방과 함께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을 초청해 이뤄진 것이다. 김정일은 1980년 조선노동당 6차 당대회에서 공식적으로 김일성의 후계자가 된 이후 첫 외출이었다. 김정일은 자신의 핵심 측근인 오진우‧연형묵‧현준극‧정경희 등과 함께 갔다.

덩샤오핑도 중국 최고 지도자를 총동원했다. 후야오방‧자오쯔양‧리셴녠‧펑전‧덩잉차오‧시중쉰 등이 김정일을 만났다. 덩샤오핑은 김일성의 후계자로서 김정일을 각별하게 대했다. 평양에서 떠나기 하루 전날 덩샤오핑은 중국의 개혁‧개방의 추진과정에서 겪은 문제들을 얘기했다.

덩샤오핑은 “중국은 낙후되고 가난하고 지방은 넓고 인구가 많아서 매우 복잡하다. 어떤 문제를 처리하더라도 1억 인구가 관련된다”고 시작했다. 그는 “노선이나 정책적인 문제에서 좌우의 주장이 서로 부딪히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서로 조정하고 잘 추진해서 4개 현대화의 핵심 문제를 실현하는데 모든 역량을 기울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4개 현대화는 1964년 저우언라이가 제시한 것으로 농업‧공업‧국방‧과학의 현대화를 말한다. 79세의 덩샤오핑이 41세의 김정일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은 중국의 개혁‧개방보다 다른 곳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덩샤오핑에게 “북한이 남한에서 지하 역량을 유지하는데 남조선 정부의 탄압으로 곤란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그다음 말이 화근이었다. 김정일은 “만약 조선에서 전쟁이 나면 지원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 김정일의 중국에 대한 최대 관심은 개혁‧개방이 아니라 전쟁이 일어났을 때 과연 중국이 지원해 줄 것인가였다. 덩샤오핑은 황당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했다. “그때 가서 생각할 문제다.” 북‧중 조약에서 자동 군사 개입이 모호한 상황이 돼 버린 순간이었다.

김정일은 귀국 후 바로 열린 노동당 제6기 제7차 전원회의에서 “중국공산당에 사회주의는 사라졌고 수정주의만 남았다”며 비난했다. 그리고 중국의 최대 목표인 4개 현대화도 수정주의 노선이라고 깎아내렸다. 김정일의 얘기는 며칠 뒤 중국에 알려졌다. 중국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중국공산당이 수정주의로 비난받고, 4개 현대화를 수정주의 노선이라고 모욕한 것에 아연실색했다. 덩샤오핑은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로 인해 중국의 장래가 위협받는 사태가 일어나지 말아야 할 텐데”라고 개탄했다.

중국은 그동안 개혁‧개방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장기간의 한반도 안정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김정일의 등장은 자칫하면 중국에 복병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생겼다. 결국 북핵 1‧2차 위기와 핵실험으로 우려가 현실이 됐다.

덩샤오핑이 말한 “그때 가서 생각할 문제다”가 지금도 유효할까? 북한이 핵을 갖지 않았다면 유효했을 수 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다시 발발하면 중국이 최우선으로 확보해야 할 것이 북한 핵시설이다. 70여 년 전 한국전쟁처럼 한‧미 연합군이 평양~원산을 넘어오면 그제야 고민할 상황이 아니다. 한‧미 연합군에 북한 핵시설을 빼앗기면 중국 안보에 치명적이다. 1980년대 덩샤오핑이 고민했던 상황과 다르다. 자동 군사 개입 문제를 넘어선 일이 돼 버렸다. 그래서 중국은 북한이 절대로 알려주지 않는 북핵 정보를 얻으려고 혈안이 돼 있다.

고수석 국민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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