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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상욱의 미래를 묻다

세계 휩쓰는 K팝, 한국 산업화 성공 공식 따라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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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K팝의 성공과 미래

박상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박상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열네 번째 글을 끝으로 이 코너를 마치며 풍전등화와 같은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며 각자의 안일함을 통탄하는 21세기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도 써야 하나 싶었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두운 소식과 암울한 전망은 이미 넘쳐나니까. 밝은 기운의 성공 스토리를 기술혁신과 산업화 이론의 관점에서 쓰면 독자와 필자 모두 한동안 흐뭇할 것이다.

오늘은 세계를 휩쓰는 K팝 이야기다. K팝의 성공을 추앙하는, 요샛말로 ‘국뽕이 차오르는’ 묘사는 차치하자. K팝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성장에 기여하며 외화를 벌어들이는 수출 효자 산업이 되었다. 문화산업이고 지식산업이며 창의 산업이다. 한국이 그토록 갖고 싶어했던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이다.

‘모방에서 혁신으로’ 모델로 성공

K팝 산업화의 성공은 한국의 산업화 성공 공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고(故) 김인수 고려대 교수는 혁신이론 분야의 세계적 명저 『모방에서 혁신으로』에서 한국 제조산업의 성공 요인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처음에 선진국 제품을 모방하다 역량을 축적해 점차 개량하고, 돈 벌면 아낌없이 연구개발에 투자해 기어이 스스로 혁신을 창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작은 내수시장의 한계를 극복하려 글로벌 시장을 타깃으로 하는 것도 수출지향 한국 산업의 특징이다. 무지막지한 노동(연습)량과 그것을 감내하는 근성도 과거 산업화시대로부터 물려받았다. K팝은 제조업 강국 대한민국의 산업화 성공 공식을 문화서비스 산업에 적용한 성과다.

K팝 산업의 핵심인 기획 아이돌은 한국이 발명한 포맷이 아니다. 전통적인 대중음악 비즈니스는 상업적 잠재력이 있는 뮤지션이 훌륭한 에이전트를 만나 대형 음반배급사를 통해 성공하는, 말하자면 픽업 방식으로 작동했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그룹 퀸의 스토리가 그렇다. 현대적인 아이돌 그룹은 연예기획사가 어린 연습생을 선발·육성해 데뷔시키는 방식, 말하자면 론칭(launching) 방식이다. 기획형 아이돌의 원조 격으로는 1986년에 데뷔한 미국의 뉴키즈온더블록을 꼽을 수 있다. 아이돌 체계를 꽃피운 것은 미국의 백스트리트보이즈(1996)와 영국의 엔싱크(NSync, 1997)로 본다. 한국의 H.O.T.가 데뷔한 해가 1996년이니 K팝 아이돌도 제조업처럼 재빠른 추격자(fast second) 전략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산업부문처럼 K팝도 일본을 적극적으로 벤치마킹했고, 세계시장 진출의 교두보로 삼은 것도 일본이었다. 데뷔 17주년을 맞은 멀티 엔터테이너 그룹 슈퍼주니어의 모델은 일본의 SMAP에서 찾을 수 있고, 원조 한류스타 보아의 모델로 아무로 나미에가 있다. 기획 아이돌이라는 혁신은 미국·영국·일본에서 싹텄지만, 이것을 발전시켜 열매 맺은 것은 한국이다.

수출 효자 산업으로 성장한 K팝
선진국 아이돌 포맷 수용해 결실
기회평등·능력주의가 성공 요인
고속성장 그늘 거둬내야 재도약

‘공정한 시험대’로 인식되는 오디션

지난해 11월 20일(현지시간) 2022 카타르 월드컵 개막식 공연에서 방탄소년단(BTS) 멤버 정국이 대회 사운드트랙인 ‘드리머스’를 부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11월 20일(현지시간) 2022 카타르 월드컵 개막식 공연에서 방탄소년단(BTS) 멤버 정국이 대회 사운드트랙인 ‘드리머스’를 부르고 있다. [연합뉴스]

김인수 교수는 같은 책에서 한국 사회의 높은 교육열도 성공 요인으로 제시했다. 교육열이나 민족성은 혁신이론의 논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시하기 어려웠으리라. 한국 사회에서 높은 교육열이 나타난 이유는 이렇다. 첫째, 구한말 신분제의 철폐와 국가의 패망, 이어진 일제강점기, 해방과 토지개혁,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계층구조가 완전히 리셋되어 누구에게나 출발선이 동등해졌고 평등한 기회가 주어졌다. 둘째, 자본주의를 스스로 잉태하거나 적시에 도입하지 못한 탓에 중상주의도 산업혁명도 일어나지 않은 나라에서 그나마 유일한 출세는 국가가 관장하는 과거시험에 급제해 벼슬을 하는 것이었다. 이는 통일신라 시대 이래 천 년 가까이 공부 중심의 능력주의와 시험 제일주의가 각인된 결과다.

세계적으로 능력주의가 야기하는 불평등이 정당화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가운데 유독 한국에서는 능력주의의 철옹성이 공고하다. K팝 산업에서는 과거시험·학력고사·수학능력평가의 자리를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차지한다. 오디션이라는 경쟁의 무대는 무한경쟁, 승자독식, 엘리트주의의 정당화 기제다. 오디션은 아이돌을 넘어 힙합·트로트·중창·스트리트댄싱으로 확장되었다. K팝의 능력주의 세계관에선 후천적 노력으로 극복하기 힘든 외모와 키까지 능력치의 범주에 넣는다. 시청자 투표를 좌우하는 화제성과 인지도도 정당한 자원으로 인정된다. K팝 산업은 한국적 능력주의와 경쟁주의를 기반으로 성장한 것이다. 하지만 MZ세대는 능력주의에 놀랄 만큼 우호적이다. 공부와 비교해 음악산업은 출신 지역과 가정환경에 무관하게 자신의 노력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공정하고 평평한 운동장이라 여기는 것이다. K팝 팬들은 아이돌의 노래와 춤뿐 아니라 열정과 노력, 나아가 인성을 높이 평가한다.

한국 사회의 교육열은 남다른 사교육 체계를 낳았고, 한국의 교육 체계는 사교육과 공교육의 민·관 파트너십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입시를 위한 사교육 체계가 동네 보습학원부터 대형학원까지 수직체계를 구축한 것처럼, K팝 사교육 체계는 동네 댄스학원부터 시가총액 7조원의 대형기획사까지 수직체계를 구축했다. 수년 동안 연습생을 가르치는 기획사는 교육기관이고 학벌이다. 주요 기획사에 ‘합격’한 것 자체가 스펙이 된다. 4대 대형기획사에 들어가기는 소위 SKY 대학 입학에 비견되는데 필시 몇십 배 더 어려울 것이다. 능력주의·경쟁주의·엘리트주의의 집대성인 학벌주의가 K팝에서 재현된 셈이다. 하이브·SM·와이지엔터테인먼트·JYP의 4대 기획사 수장 중에 명문대 출신이 많은 것이 과연 우연일까.

앞선 IT기술 이용한 비즈니스모델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정보통신기술을 이용한 혁신적 비즈니스모델을 발 빠르게 적용한 것도 K팝 산업의 성공 요인이다. 더 진보된 기술을 채용하는 것은 후발자의 이익이다. K팝은 유튜브로 대표되는 글로벌 미디어, 구독경제와 플랫폼 비즈니스 모델, SNS를 이용한 실시간 소통, 비교적 최근 등장한 숏폼(short-form) 비디오, 소비자 맞춤형 콘텐트 생산양식을 백분 활용하고 있다. 한류 초창기엔 해외 특정 시장에 진출하는 전략을 취했지만, 지금은 현지 앨범을 발매하고 방송에 출연할 필요가 적어졌다. 과거처럼 음악을 CD 같은 물리적 매체에 담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음반 제조와 유통 과정이 사라졌다. 음원은 애플뮤직과 스포티파이 등을 통해 전 세계 동시 공개할 수 있고, 유튜브·틱톡·V앱·인스타라이브같은 플랫폼으로 소비자들과 직접 연결된다. 한 번 제작해 업로드한 콘텐트를 되풀이 재생하는 한계비용은 제로(0)다. 스케일업에 비용과 시간이 거의 들지 않는다. 한계비용 제로 재화들 사이에서는 쏠림 현상이 나타난다. 성공적인 콘텐트는 조회 수가 수억, 수십억에 달한다. K팝은 제러미 리프킨이 말한 ‘한계비용 제로 사회’의 특징을 일찍이 간파했다. 관심과 조회 수가 곧 자본이다. 2022년을 강타한 신인 그룹 뉴진스가 ‘Attention’을 노래한 것은 상징적이다.

각종 K팝 콘텐트는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에 고해상도, 고화질, 고음질로 무료로 공개된다. K팝 뮤직비디오를 유튜브에 올리기 시작한 2000년대 초만 해도 외국 회사들은 거액의 제작비를 투자한 콘텐트를 온라인에 공개하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K팝은 과감했다. 글로벌 시청자는 고품질의 콘텐트를 무료로 즐기며 심미적·음악적 쾌감을 얻고 K팝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구독경제와 플랫폼 비즈니스가 서비스 초기에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이용자를 옭아매는 메커니즘과 똑같다. 일단 ‘입문’하면 알고리즘이 인도하는 K팝 콘텐트를 연달아 보면서 본격적으로 빠져든다. 팬이 된 소비자는 앨범·굿즈·콘서트에 지갑을 열며 아이돌의 후견인을 자처하게 된다.

제조업 육성 전략 닮은 K팝 지원

K팝 산업의 성공에 정부를 비롯한 공공부문의 역할이 작지 않았다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제조업 육성전략이 창의 산업에 적용되었다. 문화체육관광부, 한국관광공사, 한국방송공사, 아리랑국제방송은 지원하되 개입하지 않는 방식으로 K팝 산업을 지원했다. 국민의 세금과 수신료로 해외 K팝 콘서트를 개최했다. 방송사들은 음악방송을 ‘PD직캠’, ‘멤버별 직캠’ 등 맞춤형 파생 콘텐트로 직접 가공해 무료 배포한다. 지원은 있지만 규제와 개입이 없는 창의 산업은 마음껏 날개를 펴고 있다.

고속성장의 그늘을 피해갈 수 없는 숙명도 K팝 산업에서 반복되고 있다. 최근 가수 이승기와 츄(김지우)의 ‘정산 이슈’로 불거진 기획사와 소속 연예인 사이의 비대칭적 관계는 K팝의 미래를 위해 개선되어야 한다. 무한경쟁 체제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소위 ‘뜨지 못한’ 인재들에게 어떤 대안을 보장할지도 어엿하게 산업화한 K팝이 외면해선 안 될 숙제다. K팝 산업은 추격을 끝내고 세계를 선도하는 창의 산업이 되었다. K-드라마가 뒤를 잇는 가운데, 앞으로 등장할 다른 창의 산업들의 본보기가 될 K팝 산업은 그늘을 거둬내고 도약해야 할 것이다.

박상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