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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명림의 퍼스펙티브

‘기적의 보고서’ 쓸 건가, ‘멸종의 보고서’ 쓸 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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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과거와 미래, 2023년 대한민국의 선택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2023년 올해는 대한민국이 전쟁 부재와 소극적 평화를 출발한 정전협정 70주년이자 해양국가로의 위상을 확고히 한 한미동맹 70주년이다. 정전협정은 청일전쟁 이후 시작된 ‘동아시아 전쟁 60년’과 러일전쟁 이후 시작된 ‘세계전쟁 50년’의 역사에 동시에 종지부를 찍는, 한반도에서의 세계적 대합의였다. 나아가 볼셰비즘의 동아시아로의 확산 이후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 개별 전쟁을 통해 합의한 세계경계의 등장이기도 하였다.

대륙국가서 해양국가로 전환

무엇보다 정전협정과 한미동맹은 한국이 대륙국가에서 해양국가로 전환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였다. 개항 이후 전통과 근대, 대륙과 해양, 서양과 동양,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의 한반도에서 건곤일척의 세계관투쟁과 정체성 길항과 세계대결은 이 협정과 이 동맹을 통해 비로소 대단원의 한 막을 내렸다.

대륙국가에서 해양국가로의 전환을 위해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던 앞의 전반기 동안 한국은 국권상실과 강점으로 고통받았다. 그리고, 오늘의 발전과 번영을 초래한 나라의 안정과 해양국가 정체성을 확고히 구축하기 위해서는 한국전쟁이라는 세계전쟁을 또다시 치러야 했다. 따라서 그 이름과 내면, 형식과 국민의식, 그리고 안정성과 지속성에서 대한민국의 실질적 출발점은 1953년이었다. (물론 역사적, 제도적 출발은 1919년과 1948년이다.)

정전협정·한미동맹 70주년 맞아
국가위상과 정체성 확립한 시간

경제적·물질적인 성취는 기적적
인간지표는 국가·국민소멸 수준

안정적 복지국가로 비상할 시점
승자독식 정치·제도 극복이 해법

이후 발전과 번영을 향한 한국의 고속 질주는 실로 경이로웠다. 대한민국 기적의 지표들은 너무 많다. 오늘날 GDP, 무역, 수출, 외환보유고, 세계 100대 기업, 군사력, 국방비, 전자정부지수, 인터넷 속도…. 거의 모두 세계 한 자릿수 안쪽이거나 안팎이다. 강점과 전쟁을 체험한 경계국가로서 엄청 빠른 성취였다. 개별 기술과 상품들의 성취는 더욱 놀랍다. 기술과 경제와 문물에서 우리의 성취는 훨씬 많으나 예서 멈추련다.

명실상부 선진국 대열 진입

박명림의 퍼스펙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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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서는 숙명적 경쟁 관계인 일본과의 비교에서도 한국과 일본의 1인당 GDP(구매력 기준)는 역전되었다. 또한 2022년 6월 코로나19종료 시점에 경제와 방역을 기준으로 코로나19 회복력 지표에서도 한국은 세계 1위였다. 유엔무역개발회의는 2021년 195개 회원국 만장일치로 한국의 지위를 기존 개발도상국 그룹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변경하였다. 유엔무역개발회의 창설 이래 한국은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지위가 변경된 유일 사례였다. 한국은 명실공히 선진국인 것이다.

지금부터 5년 후 2028년이면 우리는 민주헌정 체제 40년과 대한민국 건국 80년을 함께 맞는다. 민주정부들의 실천이 나라 역사의 절반인 것이다. 건국 이래 앞선 40년 동안의 권위주의 정부들 못지않은 민주정부들의 성취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전체 80년과 함께 마땅히 상찬받아야 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지금까지의’ 놀라운 성취와 ‘지금부터의’ 깊은 불안의 한가운데에 놓여있다. 과거의 성공과 내일의 불안 중 어느 하나를 택해서도 어느 하나를 버려서도 안 된다. 오늘의 성취 방식과 내용에 내일의 불안의 뿌리가 놓여있기 때문이다. 세계 수준을 자랑하는 기술·무역·경제·무기·물질 지표에서 눈을 돌리면 곧바로 국가소멸과 국민멸종을 향하여 치닫고 있는 이 공동체의 각종 인간지표들이 드러난다. 인류 최악의 출산율을 포함하여 자살률, 지방소멸, 비정규직 규모, 빈곤율, 임금격차 등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 지표들도 다시 상세히 제시하지 않으련다.

국민소멸 위기와 헤어질 시간

절정의 물질발전 지표와 최악의 인간지표의 동시 등장이자 동시 모습이다. 대개의 문명국가는 물질발달과 인간지표들이 함께 발전해왔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를, 전자의 기적적 성취에서도, 후자의 최악의 지표에서도 모두 다시 쓰고 있는 셈이다.

출산소멸, 마을소멸, 지방소멸, 학력아동소멸, 학교소멸, 중앙소멸, 국가소멸의 심화와 악화의 뚜렷한 분기점에 서서 아직은 ‘각 분야별로’, 그리하여 끝내는 ‘전체’ 대한민국의 소멸 보고서만은 쓰고 싶지 않은 간절한 마음이다. 아니면, 이미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는 분야별 나라소멸의 객관적 보고서를 차라리 빨리 써야 전체 소멸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을 것인가? 눈앞이 캄캄하다.

지금이야말로 국가소멸과 국민멸종의 이 빠른 행진을 막아야 할 절체절명의 시점이다. 발전과 번영의 과실과 희망은 진영과 파당, 계층과 성별, 세대와 세대, 중앙과 지방을 넘어 넓고 고르게 퍼져나가야 한다. 권력도 부도, 가치도 생각도, 함께 나눌 때 더 커지고, 더 안정되고, 더 발전한다.

그게 나라다. 그게 민주공화국이다. 일인과 소수와 한 진영의 승자 독식·독점·독임을 지양하며, 다양한 생각과 목소리를 허용하고 모으며, 대화와 타협을 통해 서로 공존하고 통합할 수 있는, 품 넓고 훈련된 지도자, 정치방식과 나라운영, 헌정체제와 정치제도가 필수다.

국민의 뜻에 맞춰 권력 나눠야

제발, 그리고 반드시 국민 뜻에 맞추어 권력을 나눠야 한다. 이른바 대표성·민주성·비례성·대의성을 말한다. 민주주의 역사를 돌아볼 때 절반의 생각과 진영만으로는 민주국가는 고르고 넉넉하며 안정적인 복지국가로 도약할 수 없다. 민주국가가 대의국가이자 민주공화국이어야 하는 근본 까닭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대로 주저앉거나, 후퇴하거나, 심한 경우 멸망한다. 우리의 모든 민주정부는 절반조차 되지 않는 국민 지지와 득표로 출범하였다.

우리는 그동안 권력과 인재, 생각과 가치, 의견과 정책의 일인·일당·일진영 집중과 독점·독식·독임, 그리고 그로 인한 세계 최고 수준의 정치·사회·진영 갈등지표들, 그에 따른 진영 의제 우선 및 공동체 의제의 방치를 계속 목도해왔다. 최악 수준에 도달한 정치의 독점화와 진영화와 양극화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경제와 사회의 양극화는 더욱 악화할 것이다. 보수 의제와 진보 의제를 넘는, 즉 진영을 넘는 공동(체)의제와 나라 의제, 무엇보다도 인간 의제들은 점점 버려질 것이고, 그 결과가 오늘의 가공할 출산율과 학교소멸이며, 지방소멸과 국민멸종 위기인 것이다.

각 진영의 승리와 패배의 반복은 이를 뚜렷하게 보여준 바 있다. 우리는 왜 진영 독식과 최고 수준의 정치갈등과 최악의 인간지표들의 결합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있는가? 도대체 100석(62석+38석)에 달하는 다른 정당들의 찬성으로 인해 탄핵을 이루었음에도 대선 이후 즉각 승자독식으로 돌아가는 졸렬과 만용은 어디에서 나오며, 0.73%라는 간발의 차 승리에도 불구하고 일체의 연합·연립과 협력통치 없이 승자독식을 하는 협량과 일방주의는 또 무엇인가?

특정 진영의 승전가 사라져야

두 진영 모두 자기를 지지하지 않은 절반 이상의 훨씬 더 많은 투표와 민심은 마치 모두 ‘사표’(死票)이자 ‘죽은 표’요, ‘존재하지 않는 민심’이며 ‘없는 국민’으로 간주하려는 오만한 태도가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정치다. 그리하여 우리 공동체는 지금 ‘대한민국 기적의 보고서’와 ‘대한민국 멸종의 보고서’를 동시에 써야 하는 극도로 난감한 이중 상황에 놓여있다.

생각과 가치의 개별성과 차이, 다양성과 다름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자유와 창조의 원천이다. 오늘의 한국은 독식하고 윽박지르고 억압한다고 일이 되는 그런 사람들도, 그런 시대도 절대 아니다. 과거의 빛을 이어받되 어둠을 극복하고, 오늘의 성공을 공유하되 그늘을 직시하지 않으면 이 공동체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다. 물론 자기 진영과 파당의 이익과 미래는 승자독식의 기간만큼은 잠시 밝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패배하면 온갖 반대와 투쟁뿐이다.

그러는 동안 공동체는 더욱 골병이 들고 청년들은 출산을 더욱 거부하며, 아이들 울음소리는 더욱 빠르게 멈추고 지방은 더욱 빨리 소멸할 것이다. 보수와 진보, 둘 중 한 진영의 승전가가 높을수록 공동체 전체의 패배와 소멸의 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나라 모습이다. 명실 공한 대한민국의 출발 70주년을 맞아 나라의 생존과 지속을 위한 대통령과 정부, 의회와 정당의 대성찰과 대전환을 이토록 절실하게 호소한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