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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연하장 채운 ‘칠곡할매 글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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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윤석열 대통령 연하장 아래에 권안자 할머니가 만든 ‘칠곡할매글꼴’을 사용했다고 쓰여있다. [사진 경북 칠곡군]

윤석열 대통령 연하장 아래에 권안자 할머니가 만든 ‘칠곡할매글꼴’을 사용했다고 쓰여있다. [사진 경북 칠곡군]

한글을 막 깨친 시골 할매(‘할머니’의 사투리) 5명의 손끝에서 나온 ‘칠곡할매글꼴’이 윤석열 대통령 연하장에 등장해 화제다.

윤 대통령이 새해를 맞아 각계 원로, 주요 인사, 국가유공자 등에게 신년 연하장을 발송했는데 그 글씨체가 칠곡할매글꼴이다.

연하장에는 ‘늦은 나이에 경북 칠곡군 한글 교실에서 글씨를 배우신 권안자 어르신의 서체로 제작되었습니다’라는 소개 글도 들어갔다.

어린이가 쓴 듯한 이 글꼴은 권안자(79)·김영분(77)·이원순(86)·이종희(81)·추유을(89)씨 등 할머니 5명의 작품이다. 대통령 연하장에 자신의 글씨체가 사용됐다는 소식에 권안자 할머니는 “인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전했다.

권 할머니가 윤 대통령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모습. [사진 경북 칠곡군]

권 할머니가 윤 대통령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모습. [사진 경북 칠곡군]

윤 대통령은 2년 전 검찰총장 때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이 글꼴을 썼다. 윤 대통령은 당시 “칠곡군 문해교실에서 한글을 배운 어르신 사연을 듣고 SNS에 사용하게 된 것”이라며 “어르신들 손글씨가 문화유산이 된 것과 한글의 소중함을 함께 기리는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칠곡할매글꼴은 칠곡군이 지역 어르신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성인문해교실’을 통해 탄생했다. 뒤늦게 한글을 배우고 깨친 할머니 글씨를 보존하기 위해 2020년 12월쯤 개발돼 세상에 나왔다. 칠곡군은 당시 할머니 글씨 400개 중 5명의 글씨체를 뽑았다. 그 주인공들은 글꼴을 만들기 위해 4개월간 각각 2000여장에 이르는 종이에 글씨를 써가며 연습했다. 어르신들이 하기엔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유독 힘들었던 건 영어와 특수문자였다. 이때 손주들이 지원군으로 나섰다. 손주들이 옆에서 할머니 서체 만들기를 도왔다고 한다. 그 결실이 칠곡할매글꼴이다. 유명인이나 역사적 인물이 아닌 시골 할머니 손글씨가 서체로 만들어진 첫 사례였다.

한글사랑 운동을 펼쳐온 방송인 출신 역사학자 정재환 교수와 외솔 최현배 선생의 손자 최홍식 전 연세대 명예교수가 글꼴 홍보에 나섰다. 경북 경주시 황리단길에는 칠곡할매글꼴로 제작된 대형 글판이 내걸리고 한컴오피스와 MS오피스 프로그램에 칠곡할매글꼴이 정식 탑재됐다. 국립한글박물관은 글꼴을 휴대용저장장치에 담아 유물로 영구 보존했다.

김재욱 칠곡군수는 “칠곡할매글꼴은 정규 한글 교육을 받지 못한 마지막 세대의 문화유산으로, 한글이 걸어온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새 역사를 쓴 것”이라고 말했다.

칠곡할매들은 시 쓰는 할머니로도 유명하다. 한글을 배우는 한 과정으로 시를 쓰면서다. 할매들은 이런 시를 쓴다.

‘나는 백수라요/묵고 노는 백수/콩이나 쪼매 심고/놀지머/그래도 좋다.’ -이분수 할머니의 ‘나는 백수라요’(2016년 10월 2집 『콩이나 쪼매 심고 놀지머』 수록).

시 쓰는 칠곡할매들은 다큐멘터리 영화 ‘칠곡 가시나들’로도 소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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