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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동안 통하던 ‘떼법’ 안 먹히자, 무기력해진 민노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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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뉴스분석 

화물연대가 지난 9일 총파업을 철회했다. 11일 경기도 의왕시 내륙컨테이너기지 에서 화물차가 컨테이너를 싣고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화물연대가 지난 9일 총파업을 철회했다. 11일 경기도 의왕시 내륙컨테이너기지 에서 화물차가 컨테이너를 싣고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9일 민주노총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조 화물연대본부(이하 화물연대)의 집단 운송 거부가 16일 만에 끝났다. 정부의 완승이란 평가다. 화물연대는 빈손으로 돌아섰다. 민주노총의 총파업도 맥없이 막을 내렸다. 익명을 요구한 경영계 관계자는 11일 “일등 공신은 경제적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데도 법과 원칙을 고수한 정부와 이를 지지하고 인내한 국민”이라고 말했다. “사회규범(법·원칙)을 통한 국가 작동 원리를 재정립했다”는 평을 덧붙였다.

이번 사태 해결 과정은 향후 노사관계와 노동 개혁 여정에서 가이드라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민주당이 주장하는 ‘노란봉투법’ 입법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문재인 정부에선 힘으로 밀어붙이는 ‘떼법’이 사실상 묵인됐다. 사업장 점거가 비일비재했지만, 정부나 경찰은 고발장이 접수돼도 눈을 감았다. 노동계가 ‘촛불 채권자’로서 국가 법체계를 뛰어넘는 강력한 세력으로 자리매김했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반면에 윤석열 정부는 노동계에 빚을 진 게 없다. 이게 법과 원칙을 잣대로 삼아 정책을 추진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노동계에 빚 없는 윤 정부 원칙 대응

화물연대는 이런 시대 변화를 읽지 못했고, 이는 고립을 자초했다. 지난달 말과 이달 초 서울교통공사와 전국철도노동조합(코레일)이 각각 파업을 철회했다. ‘파업 대오’에서 빠져나간 셈이었다. 하지만 화물연대는 이를 애써 외면했다. 다른 노조들은 ‘근로조건의 개선’이나 산업 내부의 일이 아닌 정치색 강한 파업에 부담을 느끼며 물러난 것이었다. 사실 화물연대가 속해 있는 민주노총 지도부는 타협보다는 파업이라는 강수에 익숙하다. 이들이 겉으론 비정규직 보호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대규모 파업을 통한 계급 간 투쟁에 집중한다는 비난도 여전하다. 개인의 삶이나 개별 사업장 문제에 집중하려는 최근 MZ세대 노동자들과는 추구하는 바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실제 MZ세대 노동자는 민주노총의 총파업에 반기를 들며 불참을 끌어낸 주도 세력이다. 화물연대의 집단 운송 거부 당시 정부가 운송개시명령을 발송하자 이를 스스럼없이 받아든 사람 상당수도 MZ세대 기사들이었다는 게 정부의 분석이다.

이런 괴리로 인해 화물연대는 물론 민주노총까지 큰 상처를 입었다. 민주노총은 화물연대 파업 철회 투표를 앞두고 오는 14일 총파업을 다시 한번 선언했다. 앞서 지난 6일 강행했던 총파업에 대형 사업장이 거의 불참한 상태에서도 무리하게 세를 끌어모으려 했다. 하지만 이는 결국 무위에 그쳤다. 장신철 한국기술교육대 고용서비스학 교수는 “노동운동이 합리성을 상실한 채 물리력과 떼법에 의존하는 구시대적 행태를 고수하고 있다는 점을 전 국민에게 오히려 각인시킨 행동”이라고 말했다. 이어 “시대 변화를 못 읽는 노동운동의 폐쇄성이 사라지지 않으면 고립을 자초하고 노조의 존립이 위협받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여기에 이번 파업 철회는 노동계 내부에서 ‘왜 책임지는 이는 없나’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나오게 만들었다. 특히 본격적인 파업 철회에 앞서 화물연대 부산본부가 투표 없이 일터 복귀를 선언한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다. “투표로 철회 여부를 결정하는 행위는 지도부가 조합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라는 내부 목소리는 현장 노동자와 노동계 지도부 간 괴리가 얼마나 큰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 피해는 고스란히 현장 노동자에게 돌아간다. 한 예로 16일간의 파업으로 인해 당장의 벌이가 끊긴 화물기사의 고통은 보상받을 길이 없다. 여기에 정부와 산업계는 화물연대 등을 상대로 파업 기간에 발생한 피해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입장이다. 역시 과거였다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현실이 이렇다. 민주노총과 화물연대의 투쟁에 보인 국민의 싸늘한 여론을 고려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일부는 과거 화물연대의 파업 국면에서 원칙을 강조하며 이를 해결했던 노무현 정부를 떠올리기도 한다. 이번에 큰 위력을 발휘한 업무개시명령 제도 역시 2004년 노무현 정부 당시 도입됐다.

야당 추진 ‘노란봉투법’ 암초 만나

경영계는 일단 한시름 덜었다는 반응이다. 모 기업 인사노무담당 임원은 “(정부의 대응이) 노조의 무분별한 행동에 버틸 수 있는 힘을 찾아줬다”고 말했다. 모 건설사 대표는 “지난 정부의 과오가 내재화해 곪아 터지기 전에 수술돼 다행”이라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이 추진하는 ‘노란봉투법’은 큰 암초를 만났다. 노란봉투법은 불법행위를 하더라도 노조에 의해 저질러졌다면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게 골자다. 반대로,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개혁은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의 지시로 꾸려진 미래노동시장연구회는 노동개혁 과제 도출을 끝냈다. 정부는 연구회의 권고문이 나오는 대로 개혁에 착수할 예정이다.

다만 분쟁과 갈등을 정부가 힘으로만 막으려 들면 재발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화물연대와 민주노총의 총파업 사태를 계기로 법과 원칙을 확실하게 세우되 그 속에서 타협하는 문화를 정착시킬 방안에 대한 숙의가 필요하며, 이는 윤 정부가 향후 생각해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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