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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하거나 혼란스럽거나, 세상은 둘 중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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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이기봉 작가는 “물이나 안개는 사물의 모습을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소재”라고 말했다. 사진은 ‘당신이 서 있는 곳 초록-1’(2022). [사진 국제갤러리]

이기봉 작가는 “물이나 안개는 사물의 모습을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소재”라고 말했다. 사진은 ‘당신이 서 있는 곳 초록-1’(2022). [사진 국제갤러리]

수풀이 짙은 안개에 휩싸였다. 이른 아침일까. 주위에 아무 빛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물과 나무와 풀뿐이다. 보는 사람을 압도할 정도로 고즈넉한 풍경이다. 여기선 누구라도 곧 길을 잃을 듯하다. 화가 이기봉(65)이 그리는 풍경은 늘 이렇게 안개로 뒤덮여 주변이 실체를 선명하게 드러내지 않은 모습이다. 그가 바라본 세상의 모습이다. 그는 “세상이 본래 흐릿하거나, 혼란스럽거나 둘 중의 하나”라며 “누군가는 여기서 안도감을, 또 다른 누군가는 두려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기봉의 개인전 ‘당신이 서 있는 곳(Where You Stand)’이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 1, 2관, 부산점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다. 2012년 아르코미술관 전시 이후 10년 만에 여는 개인전이다. 10년간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가 자연의 순환과 사라짐에 대한 사색을 담은 작품 50여 점을 들고 나타났다. 요즘 국내외 아트페어에 출품될 때마다 1억원 넘는 가격에 작품이 날개 돋힌 듯 팔리고 있다는 그를 최근 전시장에서 만났다.

국제갤러리 개인전 ‘당신이 서 있는 곳’

이기봉

이기봉

왜 안개 속 풍경인가.
“세상이 본래 둘 중에 하나다. 물론 이 흐린 풍경 뒤에 맑은 풍경이 있다. 실제로 내 작품 겉의 장막을 걷어내면 실제로 더 선명하고 멋있는 그림이 있다. 하지만 맑고 투명한 것은 잠시다. 난 내 작품에서 두 겹의 그림이 서로 막을 사이에 두고 호응하며 그 어떤 환영(歡迎)을 만드는 게 좋다.”
환영은 사실이 아닌 게 사실로 보이는 모호한 상태다.
“환영이야말로 우리 인간에게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환영 없이 사는 거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화가로서 내 소망은 그 환영을 끄집어내고 또 그것을 환기시키는 거다. 흐리거나 혼란스러운 게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그게 오히려 삶의 본질에 가깝다.”
전시 제목이 ‘당신이 서 있는 곳’인데.
“‘당신이 서 있는 곳이 곧 세계’라는 뜻이다. 딴 데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지 말라는 뜻이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건, 여기 혼자 서서 이렇게 좀 망연히 도달할 수 없는 곳을 멀리 바라보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도달할 수 없는 곳, 지금 우리가 있는 곳(실재), 그리고 그사이의 환영(환상), 이 세 가지가 삶의 조건이 아닐까.”

이 씨는 “10여 년 전 본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라는 그림이 세상과 그림에 대한 내 생각을 굳히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독일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1774~1840)의 이 그림은, 한 남자가 바위 위에 서서 안개 사이로 끝없이 펼쳐진 산맥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웅장하고 신비롭고 고독한 분위기의 작품이다. “그것을 본 순간 ‘바로 이거다’ 싶었다. 내가 고민해온 문제들이 바로 이 풍경화 안에 다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신작 캔버스를 덮은 표면의 클로즈업 모습.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책에서 발췌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뉴시스]

신작 캔버스를 덮은 표면의 클로즈업 모습.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책에서 발췌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뉴시스]

흐릿한 느낌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캔버스에 그린 그림 위에 플렉시 글라스(얇은 아크릴판) 또는 반투명한 천(폴리에스테르 섬유)에 그려진 이미지를 덧댄 결과다. 내 작품은 이렇게 두 개의 그림으로 완성된다.”

그가 그림을 그리며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공간의 깊이’다. 그는 “두 겹의 그림 사이는 물리적으로는 1㎝밖에 되지 않는다”며 “하지만 ‘물안개’처럼 보이는 이 효과가 무한의 깊이로 보이길 바란다”고 말했다.

풍경에 물가, 나무가 등장한다.
“물과 안개는 내 그림에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림을 그릴 땐 습도, 온도까지 생각한다. 물은 사물의 모습을 변화시키고 초월적 영역에 다가가게 한다. 안개는 찰나에 존재를 드러내고 사라지며 수수께끼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여러 층위가 얽히고설킨 세계 가시화”

이 풍경엔 사람도 없고 집도 보이지 않는다.
“완벽하게 홀로 있기 위해서다. 어떤 보호 장치도 없이 홀로 던져졌을 때의 마음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어떤 사람은 당황스러울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굉장히 외롭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더 강인해질 것이다. 평상시 드러나지 않았던 사물의 다른 측면을 보며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면 좋겠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새로운 연작도 선보이고 있다. 몽환적 풍경을 가리는 표면을 다른 형상이 아니라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의 저서 『논리철학 논고』에서 발췌한 텍스트가 오톨도톨하게 덮고 있다. 캔버스의 이미지와 그 위의 텍스트가 겹쳐 보이며 안개처럼 흐릿하게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다. 실재하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의 간극을 고스란히 드러낸 작품이다.

그는 “내가 드러내고 싶은 것은 여러 층위가 얽히고설킨 세계의 복잡성을 가시화하는 작업”이라며 “나는 미술가보다는 ‘몽상적인 이미지의 예술을 만들어낸 공학자’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기봉은 1957년생으로 서울대 미대를 졸업했다. 고려대 미대 교수를 역임했으며 2016년부터 작업에만 전념하고 있다. 한국 국립현대미술관, 호암미술관, 리움미술관, 독일 ZKM미술관 등이 그의 작품을 소장했다. 전시는 3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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