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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파일] 벤투 리더십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16호 31면

이창균 경제부문 기자

이창균 경제부문 기자

한국이 4강 진출 신화를 썼던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히딩크 리더십’이 화두였다. 감독으로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끈 거스 히딩크의 성공은 한국 조직 사회에서 지도자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됐고, 각 기업 연구소와 경영대학원 등에선 앞다퉈 히딩크 리더십을 벤치마킹했다(『대중문화사전』, 김기란·최기호). 월드컵 이전 부진한 성적으로 비난에 직면하면서도 강팀과의 평가전을 고집한 소신, 창의적 플레이를 위해선 선수들의 기초 체력 훈련부터 필요하다고 본 혜안, 연공서열 관행 타파에 나선 결단력 등 히딩크 리더십의 요체는 지금도 각계를 매료시키고 있다.

올해 카타르 월드컵에선 파울루 벤투 감독의 리더십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온라인 주요 커뮤니티에선 “벤투가 계약 연장으로 4년 더 태극전사들을 이끌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글이 줄을 잇고 있다. 뜻밖의 반응이다. 결과로 모든 걸 증명했던 히딩크와 달리, 벤투는 3일 새벽의 조별 예선 마지막 경기인 포르투갈전에 앞서 우루과이·가나와 맞붙어 1무 1패라는 부진한 성적을 냈는데도 말이다. 오프라인에서 지인들에게 묻자 “경기력이 좋지 않으냐” “얼마 만에 보는 (한국의) 시원시원한 축구인지 모르겠다” 등 반응이 돌아왔다. 2대 3으로 아쉽게 진 가나전만 해도 한국은 슈팅 수(22개)와 점유율(64%), 패스 성공률(86%) 등에서 상대를 압도했다.

카타르 월드컵 가나전에서 레드카드를 받은 파울루 벤투 감독(오른쪽). [뉴시스]

카타르 월드컵 가나전에서 레드카드를 받은 파울루 벤투 감독(오른쪽). [뉴시스]

0대 0 무승부를 기록한 우루과이전도 상대가 전통의 강호라는 점을 고려하면 잘 싸웠다는 평가다. ‘벤투 리더십’을 재평가하는 사람들은 벤투가 과거 한국 축구에선 볼 수 없던 제대로 된 빌드업(상대 압박을 무력화하고 공격을 전개하는 일련의 움직임과 패스 워크)을 강팀들을 상대로 해낸 데 주목한다. 빌드업이 세계 축구의 대세임을 강조하는 전문가들마저 “벤투의 빌드업 철학은 약팀이 많은 아시아에서나 통하지 월드컵에선 안 통한다”며 우려한 바 있지만, 결국 벤투의 뚝심이 빛을 발했다는 것이다. 거꾸로 고집을 내려놓고 이강인 선수를 조커로 중용해 한국 축구의 희망을 보인 유연성도 호평 대상이다.

인상적인 장면은 또 있었다. 가나전에서 앤서니 테일러 주심이 한국의 마지막 코너킥 기회를 외면하고 경기 종료 휘슬을 불자 벤투는 주심에게 달려가 격렬하게 항의해 퇴장까지 당했다. 이 행동이 경솔함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김영권 등 당시 주심을 향해 격렬하게 항의하던 선수들이 경고를 받아 다음 경기에 못 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발휘한 고도의 임기응변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선수에게 향했던 주심의 시선, 카드를 꺼내려는 움직임을 감독 쪽으로 돌리기 위한 의도적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진실은 벤투만이 알겠지만 그는 일단 기자회견에서 “모든 책임은 (감독인) 나에게 있다”며 선수나 환경 탓을 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사실 개인적으로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가나전 레드카드를 받고서 벤투가 보인 모습이다. 그는 주심 앞에서의 분노한 얼굴을 갑자기 평온한 얼굴로 바꾸면서 돌아서더니 가나 측과 담담하게 악수하며 인사를 했다. 통상 사람이 화가 나면 화낼 대상이 아닌 괜한 사람에게 화풀이하는 경우가 많다. 그 괜한 사람이 권력자 등 강자가 아닐수록 그럴 확률도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벤투는 정확하게 화낼 대상 한 명한테만 화내는 거로 끝내는 절제력을 보였다. 이런 벤투 리더십의 이모저모를 히딩크 신드롬 때처럼 인상 깊게 봐서 하나라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우리 사회의 리더가 많아진다면 월드컵 16강 진출보다 훨씬 값진 성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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