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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인욱의 문화재전쟁

종교 화합의 성소피아 사원, 왜 다시 이슬람 모스크 됐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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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튀르키예의 문화통치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지금은 아나톨리아 반도에 있는 튀르키예(터키)는 유럽의 관문이면서도 유라시아를 대표하는 튀르크계의 주민이 중심이 된 나라다. 이러한 이중성은 그들의 역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실제로 튀르키예가 위치한 아나톨리아반도는 신석기시대 이래 그리스와 근동의 찬란한 유산이 숨 쉬는 문명의 중심지이지만, 정작 튀르크인은 자신들을 흉노의 후예로 생각한다.

이러한 양면성 때문인지 튀르키예는 한편으로는 이스탄불에 거점을 두고 유럽의 일원이 되려 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에서는 유라시아 이슬람권을 대표하여 튀르크계가 중심인 유라시아의 패권을 차지하려 한다. 튀르키예는 최근 이스탄불의 세계문화유산인 성소피아 사원을 모스크로 바꾸면서 국제적인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슬람주의를 내세우고 최근 국호까지 터키에서 튀르키예로 바꾸었다. 다시 유라시아의 패자로 발돋움하려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야심과 성소피아 사원을 둘러싼 문화재 갈등을 살펴보자.

‘이스탄불의 얼굴’ 성소피아 사원
기독교·이슬람 문화의 공존 상징

‘튀르크의 부활’ 꾀하는 에르도안
기존 박물관을 이슬람 공간으로

유라시아에 대한 세력확장 노려
권력·정치에 멍든 세계문화유산


유라시아를 둘러싼 동상이몽

튀르키예 이슬람 교인들이 이 스탄불 성소피아 사원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 박물관으로 사용됐던 성소피아 사원은 최근 이슬람 모스크로 다시 바뀌었다. [로이터·EPA=연합뉴스]

튀르키예 이슬람 교인들이 이 스탄불 성소피아 사원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 박물관으로 사용됐던 성소피아 사원은 최근 이슬람 모스크로 다시 바뀌었다. [로이터·EPA=연합뉴스]

에르도안이 성소피아 사원을 박물관에서 모스크로 되돌린 것은 바로 종교를 이용하여 세속 권력을 강화하려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슬람 튀르크 계통의 여러 국가와 연대하여 다시 강대국으로 나서고 싶어하는 바람이 숨어있다.

튀르키예는 20세기부터 거대한 유라시아를 두고 중국·러시아와 다투어왔다. 러시아의 경우 푸틴 정책의 핵심인 알렉산드르 두긴이 제창하는 ‘유라시아주의’를 내세운다. 중국은 겉으로는 실크로드(일대일로)를 내세우지만 사실상 다원일체론을 내세워 유라시아 여러 민족을 궁극적으로 중국사에 편입하려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튀르키예도 가세하여 튀르크 중심의 유라시아를 만들려 한다.

성소피아 사원 안에서 기도하고 있는 튀르키에 사람들. [로이터·EPA=연합뉴스]

성소피아 사원 안에서 기도하고 있는 튀르키에 사람들. [로이터·EPA=연합뉴스]

이러한 튀르키예의 시도는 유라시아 각지의 주민 구성과도 연결돼 있다. 실제로 현재 유라시아 일대를 차지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튀르크 계통으로, 유라시아의 80%가 원래 튀르크 계통이라는 주장도 있을 정도다. 서쪽으로는 튀르키예에서 중앙아시아의 여러 국가를 거쳐 동쪽으로는 북극권의 사하공화국까지 이어진다. 무척 넓은 지역이지만 정작 튀르크계 주민 사이에는 언어도 아주 유사한 편이다.

튀르크 계통 사람들이 유라시아 전역을 장악하게 된 또 다른 배경에는 이슬람교가 있다. 우리에게는 고선지 장군으로 유명한 탈라스 전투가 큰 역할을 했다.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는 751년 지금의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국경 지대인 탈라스 계곡에서 이슬람세력을 대표하는 아바스 왕조에 대패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각종 예술품이 공존하는 성소피아 사원의 천장 모습. [로이터·EPA=연합뉴스]

기독교와 이슬람의 각종 예술품이 공존하는 성소피아 사원의 천장 모습. [로이터·EPA=연합뉴스]

그 이후 중앙아시아 튀르크계 민족은 이슬람교와 이슬람 문명을 받아들였다. 튀르크라는 언어의 유사성에 종교가 더해지면서 지금까지도 유라시아의 다수를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중앙아시아 5개국(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으로 분리돼 있다. 그런데 이런 분류는 중앙아시아 튀르크 사람들의 세력을 분리하기 위하여 스탈린 시절에 임의로 만든 국가에서 시작된 것이다.

최근 튀르키예를 중심으로 튀르크계 국가들은 본격적으로 단결하고 있다. 이들은 ‘튀르크계 국가 정상회의(Turkic States summit)’을 결성하였다. 지난 11월 11일에도 우즈베키스탄 실크로드의 중심지인 사마르칸트에서 터키와 중앙아시아의 5개국, 그리고 헝가리 등 7개국의 정상이 참여하여 협력을 도모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유라시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약화하는 틈을 타서 튀르크계 국가들의 협력이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성소피아 사원을 선택한 에르도안

지난달 열린 ‘튀르크계 국가 정상회의’에 참가한 각국 지도자들. [로이터·EPA=연합뉴스]

지난달 열린 ‘튀르크계 국가 정상회의’에 참가한 각국 지도자들. [로이터·EPA=연합뉴스]

다시 이슬람과 유라시아의 맹주로 돌아가려는 에르도안 대통령은 문화재를 정치에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스탄불 시장 시절부터 성소피아 사원을 박물관에서 모스크로 바꾸려는 의지를 표명했고, 급기야 2022년 7월 박물관에서 다시 모스크로 전환하는 행정명령을 발동했다.

세계적인 건축물로 꼽히는 성소피아 사원은 여러 종교가 얽혀 있다. 이스탄불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기 4세기 때 초기 기독교 건물(바실리카 양식)로 출발했고, 532년에 지금의 교회로 완성됐다. 1453년 오스만 튀르크가 동로마제국 수도인 콘스탄티노플(현재 이스탄불)을 점령한 이후에는 모스크 사원으로 기능했다. 지난 1600년 가까운 역사에서 900여 년은 동방정교회, 60여 년은 가톨릭교회, 600여 간은 이슬람교 사원으로 사용되었다.

튀르키예를 건국한 케말 파샤(아타 튀르크)는 이러한 복잡한 상황을 타개하고 유럽의 일원으로 되고자 했다. 종교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자 1935년 성소피아 사원을 박물관으로 만들어서 종교 행사를 금지했다. 유네스코는 이 사원을 종교가 아니라 예술적인 건축품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여 종교 간 갈등을 차단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케말 파샤의 친서방적인 세속주의를 반대하고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슬람계 튀르크인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정치적인 힘을 키웠다. 이슬람계 국민의 지지를 더욱 굳건하게 하기 위하여 성소피아 사원을 다시 이슬람의 터전으로 만들려고 한다.

튀르키예의 결정에 유네스코는 즉각 우려를 표명했다. 박물관에서 사원으로 변경되는 과정에서 유네스코와 사전 협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면서 기존의 문화재가 파괴되고 타 종교인의 출입이 제한되는 점을 우려했다.

반면에 튀르키예 정부는 성소피아 사원의 건물과 예술품은 파괴하지 않고 예배만 드린다는 점을 들어서 내정간섭을 주장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취지에서 문화재는 그것을 소유한 국가와 지역사회 주민들의 뜻을 존중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다행히도 성소피아 사원에 대한 훼손이나 출입통제는 아직 없기 때문에 논란은 잠시 가라앉은 상태다. 하지만 국호를 바꾸고 이슬람주의에 입각한 강대국으로 탈바꿈하려는 에르도안인지라 언제 어떤 사건이 벌어질지 고고학계는 긴장하고 있다.

파괴·약탈의 역사가 남긴 상처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

역설적으로 성소피아 사원은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한데 어울려졌기 때문에 세계적인 문화재가 될 수 있었다. 성소피아라는 이름은 ‘위대한 지혜’라는 뜻을 여성에 빗댄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고대 이집트와 근동에서 시작되어 그리스와 영지주의를 거쳐 기독교로 이어져 왔다. 서구 기독교에서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성당과 같이 성당을 여성화하고 성모 마리아를 숭배하는 것과도 연관되어 있다.

건축적으로 보아도 성소피아 사원은 비잔틴에서 오스만 튀르크로 이어지는 다양한 종교와 문명이 결합한 유구한 이스탄불의 역사를 담아냈다. 서구 문명의 핵심인 비잔틴 양식 건축기술로 처음 지어졌고, 이후 슐레이마니예 사원(오스만투르크의 건축가 시난이 설계하여 1557년에 완성됨)과 같은 오스만 튀르크의 많은 이슬람 사원 건축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하나의 종교에서 분화했기에 서로 쉽게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이렇듯 성소피아 사원은 비단 하나의 종교로 규정될 수 없는 다양한 문화의 총체이자 서로 융합하며 발전한 튀르키예의 상징이다.

사실 성소피아 사원의 논쟁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마치 종교 간의 갈등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화재 파괴의 주범은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탐욕이다. 성소피아 사원의 역사는 문화재 파괴와 약탈의 역사이기도 했다.

같은 기독교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726년에 레오 3세의 명령으로 사원 안의 성상이 모두 파괴됐다. 1204년 4차 십자군 원정 때에 동방정교회의 성소피아 사원을 가톨릭 성당으로 바꾼다는 미명 하에 성당 안의 보물을 모두 약탈하고 문화재를 파괴했다. 그리고 1453년 오스만 튀르크에 함락당하면서 이슬람의 모스크로 탈바꿈했다.

다행히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메흐메트 2세는 건물과 예술품을 훼손하지 않는 방법으로 모스크로 재건축했다. 종교적인 차이를 뛰어넘는 아름다운 건축물임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종교를 뛰어넘는 포용성, 그리고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진정한 지도자의 역할임을 드러냈다. 권력과 이데올로기를 위해서 종교와 문화재를 이용하려는 세계 각국의 정치인에게 던지는 성소피아 사원의 교훈이 아닐까.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