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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의 세사필담

아름다운 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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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온 국민이 넋 놓고 하나의 열망으로 수렴된 시간은 얼마 만인가. 정쟁의 소음을 벗어던지고 멋진 한 골을 고대한 시간은 얼마 만인가. 카타르 그라운드를 적토마처럼 누비는 우리 청년들의 모습은 듬직했다. 철벽 수비였다. 상대가 공을 가로채면 모두 쏜살같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각자의 영역에서 공격을 막아내는 투혼의 앙상블은 FIFA 랭킹 16위 우루과이의  헛발질을 유도했다. 가나전은 양쪽이 뚫렸다. 제자리 지키기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하나라도 자리를 이탈하면 상대의 매서운 눈초리에 걸려 패배의 쓴맛을 봐야 한다.

‘1%보다 낮은 가능성이라도 올인한다’-손흥민의 평범한 결의는 괜스레 감동적이었다. 빈틈 노리기가 그의 평생 역(役)이다. 주어진 역에 자신을 쏟아붓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개막식 무대를 선사한 BTS 정국이 절규했듯 ‘드리머스’(Dreamers)의 소망은 제자리 지키기로 실현된다. 오래 동안, 곁눈질 하지 않고, 겸손하게 말이다. 세계가 알아주는 K팝, 영화, 패션, 화장품, 반도체, 전기차가 그렇게 탄생했다. 옛말로 하면 수분공역(守分供役)의 미학, 분수를 지키고 자기 역할에 매진하는 겸양윤리.

제자리 지키는 선수들의 투혼은
수분공역의 미학을 선사하는데
혹민 경쟁에만 몰입하는 지도층
정치는 붕괴했고 이젠 종교인가

원래 반상차별의 신분질서를 유지하려는 통치 의도였지만, 현재로 의역하면 오버하지 말고 직업윤리에 충실하라는 뜻으로 풀이해도 좋겠다. 통치계급이 범부(凡夫)에게 수분공역을 외치려면 자신들이 먼저 안민익국(安民益國)에 솔선해야 한다. 지도층의 사리분별과 보국(輔國)이 수분의 전제조건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진리다. 그런데 범부는 몸을 던져 뛰고, 지도층은 혹민(惑民)과 해국(害國)을 일삼는 게 오늘날 우리의 서글픈 현실이다. 백성을 현혹하고 국익을 해치는 것. 폴 크루그만(P. Krugman)은 이런 지도층을 선동 좀비로 불렀다. 그러니 어찌 제자리 지키기는 청년들이 아름답지 않으리.

좀비가 뭘 발견했다는 듯 말했다. 원수지간이 된 연인 사이라도 그런 어법과 사고방식은 패륜일 터에, 빈곤포르노! 라고. 필자는 이 말뜻을 몰랐다. 전기가 부족한 캄보디아에서 설령 조명을 좀 켰다고 해서 그리 문제가 될까? 문(文) 전대통령의 연출을 도맡은 탁현민처럼 세련된 솜씨가 아니라서? 빈민과 어울리지 않는 김건희 여사에게 조명을 켜고라도 그리하라 윽박질러도 시원찮지 않은가? MBC기자가 도어스테핑에서 대통령에게 고함친 장면이 방영됐다. ‘뭐가 악의적인가?’라고. MBC 기자 전용기 탑승 금지를 발령한 대통령실의 결단도 군색하지만, 고함친 기자도 제자리를 지키지 않았다. 고함칠 권리가 없는 것은 아닌데 공격수 앞에 수분(守分)하러 묵언의 투혼을 다하는 월드컵 선수들에겐 부끄럽기 짝이 없다. 권리의 경계를 넘어서면 윤리가 가로막는다.

제자리를 박찬 어법은 종교에서 터져 나왔다. 혹민경연(惑民競演) 그랑프리다. 대전교구 사제와 대한성공회 원주 나눔의 집 신부가 ‘추락을 비는 염원’을 SNS에 타전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기체결함이 일어나기를, 추락하기를. 이쯤 되면 증오의 축문, 천주교와 성공회를 주술과 무격으로 강등시키는 언행이다. 추락한 것은 비행기가 아니라 그 종교였다. 하민과 천민의 고통을 지켰던 천주교 전통에 비추면 검찰 출신, 그것도 얼룩이 묻은 채 갑자기 등극한 대통령이 눈에 차지 않을 거다. 거야(巨野)의 먹이가 된 정권, 뚜렷한 비전과 로드맵 없이 흔들리는 정권이라도 고작 출범 6개월에 증오의 비기(秘記)를 그렇게 중얼거려야 했는가?

상제(上帝)의 나라에 천주의 숨결을 전해주고 혹세무민의 현실에 구원의 은총을 내렸던 천주교의 고투, 박해와 순교로 얼룩진 성령의 강림을 송두리째 내다 버린 꼴이다. 병인박해(1866년) 당시 대원군이 처형한 베르뇌 주교가 형틀에 묶인 채 말했다. 형리의 치도곤을 맞아 정강이가 부러진 채였다. “당신이 나를 죽이려는 뜻과 내가 천주의 품에 안기려는 뜻이 하나도 다르지 않소이다. 나는 기쁘게 당신의 칼을 받으려 하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새남터로 끌려가는 다뷜리 신부에게 구경꾼들은 욕설을 퍼붓고 돌을 던졌다. 그가 힘겹게 말했다. “성령의 축복을 전하지 못해 미안할 뿐 불쌍한 건 당신들이오”라고. 바람과 비와 햇살에 깃든 천주의 은총을 전하는 신부가 저주기도를 퍼부었다면 천진암 강론에서 싹튼 240년 성혼의 축제를 짓밟은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새남터 백사장은 1만여 명 순교자 피로 얼룩졌다. 그 모래로 지어 올린 명동성당의 종소리를 듣고 그 사제는 어떤 기도를 할까.

독재 시대가 아니기에 종교의 정치 참여는 정치 양식 전반에 비판과 항의를 제기하는 것이 정도다. 주말마다 광화문을 점령하는 종교집회도 마찬가지다. 조선에서 순교한 12인의 신부는 누구를 탓하지 않았다. 탄핵을 외치는 정치인들에게 묻고 싶다. 왜 선거를 했는가? 민주화 시대에 정치인은 혹민 경쟁의 선동 좀비로 변했다. 정치가 무너진 지는 오래, 이제는 종교 차례인가. 종교의 추락은 사회의 총체적 붕괴를 초래한다. 수분하고 공역하는 ‘제자리 지키기’의 무서움이 여기에 있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 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