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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AI가 바둑을 너무 어렵게 만들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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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1971년 운당여관 특실에서 열린 15기 국수전 도전 4국의 김인(왼쪽)과 조남철. AI 시대 대국에선 나올 수 없는 풍경이다. [중앙포토]

1971년 운당여관 특실에서 열린 15기 국수전 도전 4국의 김인(왼쪽)과 조남철. AI 시대 대국에선 나올 수 없는 풍경이다. [중앙포토]

바둑이 어려워지고 있다. 바둑은 본래 어려운 종목이었지만 AI의 등장으로 더욱 난해해지고 있다. AI가 바둑의 수준을 높이 끌어 올린 것은 맞지만 너무 높이 올라가는 바람에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느낌마저 준다. 프로기사는 어쩔 수 없이 AI와 더불어 산다. 신문·TV 해설자들도 AI와 더불어 산다. 모두들 AI의 깨달음과 통찰을 전수받고 AI의 비밀을 탐색하며 조금이라도 더 닮아지려고 애쓴다. 그러나 팬들은 어떤가. AI는 어렵고도 어렵다. 일단 문을 열고 들어서면 우주가 열리듯 또 다른 세상이 열린다. 그러나 AI의 옷자락이라도 거머쥐려면 보통 노력으로는 어림없다. 그건 전문가의 영역이다.

삼성화재배를 해설하면서 이 ‘난해함’은 가장 큰 난제로 다가온다.

축구는 손흥민 선수가 멋진 슛을 성공시킬 때 굳이 설명이 필요 없다. 팬들은 그 궤적과 몸놀림이 눈으로 보이기에 저절로 찬사가 나온다. 바둑은 설명해야 알 수 있다. 무슨 수를 두었는지,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고 지금 상황에서 왜 이게 좋은 수인지 비교 분석해야 한다. 축구로 비교하면 왼발 어디에 몇도 각도로 어떤 스핀을 먹여 어디를 겨냥해 찼는지 말해야 한다. 그래도 그림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비디오가 없다는 것 자체가 어려움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한데 AI가 바둑을 한층 더 어렵게 만들었다.

어려움은 곧 거리감을 의미한다. 팬들이 힘들어하고 또 새로운 팬들이 다가오기 어렵다. 어떻게 하면 바둑을 좀 더 쉽게 전달할 수 있을까. 이 화두는 바둑 전체가 고민하고 논의해야 할 눈앞의 과제가 됐다.

AI가 알려주는 바둑판 위의 변화는 고차원적이고 심오하다. 그것은 진실이다. 쉽게 전달하자고 그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 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면 바둑판은 그야말로 물리학이나 천문학처럼 난해해진다.

이세돌 9단과 알파고가 대결할 때 광화문의 모든 전광판은 바둑으로 뒤덮였다. 대국장이던 포시즌 호텔에서 바라보니 바둑이 창공에 우뚝해 보였다. 바둑의 앞길에 서광이 비치는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그 옛날의 바둑이 그립다. 운당여관의 대국장, 소복이 쌓인 눈, 섬돌에 놓인 하얀 고무신, 꽃과 나무가 있는 마당, 저쪽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가야금 소리. 그리고 방안에 들어서면 물씬 젖어 드는 승부의 세계, 그 숨소리와 눈빛.

TV 대국장엔 근접할 수 없다. 그 거리만큼 바둑도 멀어졌다. 그리고 AI와 더불어 이번엔 ‘인간’이 사라져가고 있다. 대국장은 TV 세트가 됐고 해설장은 AI가 주도한다. 잊으려 해도 운당여관 시절이 자꾸만 떠오른다. 섬돌에 놓인 하얀 고무신이 자꾸만 떠오른다.

이번 삼성화재배 결승전은 신진서 9단이 최정 9단을 꺾고 우승했다. 극적인 승부였다. 여자기사가 세계대회 결승에 오른 일은 세계대회 사상 처음이었다. 신진서라는 최강자와 맞서는 여자기사 최정. 최고의 그림이었다. 그러나 온라인 대국 탓에 이들의 모습은 섬처럼 분리됐다. 코로나 탓에 사람들은 서로 조금씩 멀리 떨어졌고 조금씩 겉돌았다. 눈빛, 숨소리, 땀방울, 갈등, 긴장감, 결심. 구경꾼을 몰입시키는 그 모든 승부의 요소들이 아쉽게도 허공으로 사라졌다.

바둑은 많은 것을 내주고 TV와 AI를 품에 안았다. 세상의 흐름인지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다. 스스로 자문해본다. 바둑의 난해함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인가. TV 해설자도 괴롭다. 때로는 ‘진실’을 전달하기 위해 빠른 속도로 10수 이상을 주르륵 늘어놓는다. 하지만 그걸 따라잡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사람이나 될까. 그렇다고 진실을 외면해야 할까.

AI는 바둑의 진실을 알려주고 있지만 바둑을 더욱 미로 속으로 끌고 간다. 방책이 없을까. 5000년을 살아남은 바둑이 지금 기로에 섰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박치문 바둑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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