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언론의 향기를 맡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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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 향기가 있다면 이런 것일까. 지난달 24일 중앙일보 지면에서 소설가 황석영과 이문열의 '아주 특별한 만남'을 처음 대하고 언뜻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일주일 동안은 모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신문을 기다리게 됐다.

황석영과 이문열이 누구인가. 반목과 불화가 일상화된 이 시대에 우리 문단의 진보와 보수를 대표하는 작가들 아닌가. 길에서 만나도 외면하고 지나칠 것 같은 두 사람이 무릎을 맞대고 앉았다는 사실이 무척 신선했다. 게다가 대담 곳곳에 녹아 있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은근한 우정은 저절로 미소를 머금게 만들었다. 연재를 다 읽고 난 후 가슴 한 구석에서 따뜻한 기운이 밀려오는 듯한 느낌을 가졌는데, 그것은 어느새 우리 사회도 뭔가 잘될 것 같다는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자라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신문을 펼치며 긴장하는 버릇이 생겼다. 사흘이 멀다 하고 터지는 대형 사고 탓도 있지만, 온통 무슨 폭로니, 극한 대립이니, 강경 투쟁이니 하는 갈등 기사들을 읽노라면 저절로 긴장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이념적 대립이 강해 전투적 구호가 난무하는 경우 신문을 편한 마음으로 읽기가 불가능해진다.

물론 갈등 기사가 많다는 것을 꼭 신문 탓으로 돌릴 일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워낙 분열과 대립의 구조에 빠져 있으니 신문이라고 별 도리가 있을까 싶다. 천신만고 끝에 민주화를 이루고도 지역 갈등으로 나라가 동서로 나뉘더니 이제는 진보와 보수의 이념 대립으로 새로운 남남 갈등을 겪고 있다. 가까운 예로 지지난해에는 언론사 세무조사로, 지난해에는 여중생 사망과 촛불 시위로, 그리고 올해에는 송두율씨 사건으로 우리 사회는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적인 싸움에 쏟아부은 것이다.

일부에서는 이런 이념적 갈등이 불가피할 뿐 아니라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굳이 변증법적 발전을 논하지 않더라도 어떤 사회가 질적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내적 갈등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현재 우리 사회의 갈등 정도가 적정하고도 필요한 수준인지는 의문이다. 아무래도 도가 지나치지 않나 싶다.

외국 생활을 해 본 사람들이 흔히 하는 이야기가 있다. 국내에서 우리가 기를 쓰고 다투는 것들이 밖에서 보면 작고 보잘것없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일이라면 그런 식으로 싸워 해결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사안이 중하면 중할수록 뒤탈이 크지 않도록 대화의 여지를 남겨두어야 하는데, 우리는 갈 데까지 가는 그런 싸움을 한다. 특히 가장 세련되게 싸워야 할 정치인이 더하다. 정치권이 하루도 편한 날이 없는 상황에서 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가진 것이라곤 사람밖에 없는 우리가 이렇게 소모적인 싸움에 매달려서야 치열한 국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념 갈등은 상당 부분 언론에 의해 증폭돼 왔다. 왜냐하면 이념 갈등이란 성격상 언론을 통해 매개되고 재생산되는 부분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언론과 정당이 동일한 정치적 지향점을 추구하는 이른바 언론과 정당의 '병행' 관계가 심화되는 현실에서 언론이 우리 사회의 이념적 갈등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는 비판은 여러 곳에서 제기돼 왔다. 언론의 으뜸가는 임무는 권력에 대한 비판과 감시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고 통합하는 일이다. 우리 언론은 과연 이 임무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수행하고 있는가.

황석영과 이문열의 대담 기사는 갈기갈기 찢어진 우리 사회를 하나로 묶기 위한 언론의 작은 노력이라고 본다. "오늘 이문열과 대하소설 한 편을 쓴 것 같다. 이런 광장이 필요해." 대담을 끝내고 황석영씨가 남긴 말이라고 한다. 우리 언론이 그런 광장이 돼야 한다.

양승목 서울대 교수.언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