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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삶의 조각을 건축물로 엮는 것, 그게 문학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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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모두 번역해 최근 13권으로 완간한 김희영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거의 평생 프루스트 연구와 번역에 시간을 쏟았다. 16일 만난 그는 “아직도 끝난 것 같지 않다”면서도 “프루스트를 번역한 지난 10년은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사진 민음사]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모두 번역해 최근 13권으로 완간한 김희영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거의 평생 프루스트 연구와 번역에 시간을 쏟았다. 16일 만난 그는 “아직도 끝난 것 같지 않다”면서도 “프루스트를 번역한 지난 10년은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사진 민음사]

“아직도 끝난 것 같지 않아요. 지금도 고치고 싶은 데가 너무 많고, 금방 개정판을 내야 할 것 같아요.”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1871~ 1922)가 평생에 걸쳐 쓴 유일한 장편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한국어 번역본(민음사)을 13권(번역본 기준), 총 5704쪽 분량으로 완간한 김희영(73)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여전히 목말라 보였다. 2012년 1권인 『스완네 집 쪽으로』가 나온 지 10년 만이다.

16일 서울 강남의 민음사 사무실에서 만난 김 교수는 “1권인 『스완네 집 쪽으로』 출간 100주년인 2012년에 국내 번역본을 냈는데, 이번엔 사후 100주년에 맞춰 완간하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그는 “이 작품은 일상에서 느끼는 세밀한, 일견 하찮은, 부스러지기 쉬운 조각들을 한데 모으는 삶의 글쓰기”라고 말했다.

총 7편짜리 장편, 등장인물 2500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주인공 마르셀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총 7편 짜리(원본 기준) 장편 소설이다. 등장인물을 다 합치면 약 2500명, 마르셀이 관찰한 인간 군상을 백과사전처럼 펼치고 당시 사회상도 함께 그렸다. 이전에 국내 첫 번역본(김창석 번역, 국일미디어, 1985)이 있었지만, 김희영 교수는 그 뒤 여러 주석과 분석을 덧붙여 87년 출간된 플레이아드 전집을 기반으로 번역을 시작했다. 2005년 출판사에서 처음 제안을 받았지만, 망설임이 길어 2012년에야 1권이 나왔다. 김 교수는 “민음사에서 세계문학전집 구색을 갖춰야 한다고 해서 1권만 내기로 했는데, 시작하고 보니 이건 전체를 다 읽어야만 진가가 드러나는 것이었다”며 전권 번역에 나선 이유를 설명했다.

김 교수는 한국외대 프랑스어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3대학에 유학하며 석·박사 과정에서 프루스트를 연구했다. 평생 프랑스 문학을 읽고, 번역하며, 가르쳤지만 직접 쓴 책은 딱 한 권(공저)이고 번역한 책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제외하고는 다섯 권뿐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번역이 거의 평생에 걸쳐 몰두한 가장 큰 작업인 셈이다. 2014년 정년 퇴임 뒤에는  민음사 담당 편집자와도 이메일로만 소통하고 만난 적이 없을 정도로 두문불출하며 번역에만 집중했다.

김 교수는 “번역하는 동안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며 “처음에는 오전 4시에 일어나 작업을 시작했지만 갈수록 자정부터 작업하는 패턴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집중력을 유지하며 쓸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6~8시간뿐이고, 원서 기준으로 하루 3쪽 정도 분량이었을 정도로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그는 “프루스트를 통해 오히려 많은 위안을 받았다”며 “같은 시대의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보다 우리나라에선 프루스트가 덜 알려진 것 같아 불문학자로서 ‘알려야겠다’는 사명감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끊임없이 확장하는 긴 문장으로도 유명하다. 한 문장이 페이지의 절반을 차지하는 경우가 흔하고, 한 페이지를 꽉 채우기도 한다. 가장 긴 문장은 931단어나 된다. 김 교수는 한글과 어순이 다른 프랑스어를, 원문의 흐름 그대로 옮겼다.

프루스트는 생전에 7권 전체의 개요를 모두 썼지만, 수정 작업을 거친 끝에 출간한 1~4권과 달리, 5~7권은 프루스트 사후에 발간돼 그가 수정하지 않은, 말하자면 미완성본이다. 김 교수는 “마무리 못 한 작품들은 문제가 여기저기서 발견되며. 특히 『사라진 알베르틴』은 미완성작”이라면서도 “그렇지만 그게 프루스트와 어울리는지도 모르겠다. ‘삶은 끊임없는 글쓰기’이고, 완성 없이 계속해서 풀려가는 것이라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어릴 때부터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등 긴 책을 좋아했다”고 밝혔다. 평생 소설을 읽으며 사는 게 꿈이었는데, 결국 그 꿈을 이룬 셈이다. 김 교수는 대학교 4학년 때 처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만났지만 “당시는 시위가 많아서 한 학기에 수업을 두세 번밖에 듣지 못했고, 1권 ‘마들렌’ 부분만 수업했는데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며 유학을 가서야 프루스트를 본격적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고 밝혔다.

“프루스트와 함께했던 지난 10년간 행복”

그는 “읽다 보니 추억의 물방울에서 이어지는 생각이 거대한 건축물로 확장되는 구절이 인상 깊었다”며 “하찮고 일상적인 삶의 조각을 건축물로 만드는 게 문학의 힘이라는 걸 느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우리를 감동시키는 건 거창한 사상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매일 느끼는 감각·감동·분위기·기분 등이란 걸 보여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프루스트는 삶에 대한 호기심이 놀라울 정도로 많고, 디테일의 중요성을 보여준 작가여서 ‘어떻게 이런 표현을 했을까’를 생각하며 늘 행복했다”며 “작품 전반적으로 악한 사람, 이기적인 사람도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이해하려는 마음을 보였으며, 인간에 대한 애정과 선의가 작품을 지탱하는 큰 축”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프루스트와 함께했던 지난 10년은 ‘행복한 시간’이었으며 그를 평생의 동반자로 택한 걸 감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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