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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보기 드문 책 팔리는 평론가 "시는 읽는 게 아니라 겪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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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신간『인생의 역사』를 낸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내 평론이) 유일무이까지는 아니더라도 가급적 고유한 것이면 좋겠다”며 “책에서 기대하는 건 '내 고민, 내 질문과 스파크가 생기는 딱 한 문장'인데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그 ‘한 문장’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경록 기자

최근 신간『인생의 역사』를 낸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내 평론이) 유일무이까지는 아니더라도 가급적 고유한 것이면 좋겠다”며 “책에서 기대하는 건 '내 고민, 내 질문과 스파크가 생기는 딱 한 문장'인데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그 ‘한 문장’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경록 기자

"인생의 육성이라는 게 있다면 그게 곧 시라고 믿고 있다". 책 표지 아래쪽에 대뜸 이런 문구가 인쇄돼 있다. 이메일 주소는 'poetica'. 라틴어라면 시(poetry)라는 뜻이다. 이쯤 되면 시쳇말로 '시에 진심'이다. '시 이야기' 정도로 읽히는, '시화(詩話)'라고 장르명을 지어 붙인 산문집 『인생의 역사』(난다)를 최근 펴낸 문학평론가 신형철(46) 얘기다.

신간 『인생의 역사』 낸 #문학평론가 신형철

지난 10일 서울대학교 연구실에서 신형철을 만났다. 그는 8년 넘게 근무했던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자리를 그만두고 지난 9월 서울대 영어영문학과로 자리를 옮겼다. 비교문학 협동 과정에서 20여명의 대학원생을 가르치며 학교가 있는 서울과 집이 있는 광주를 오간다.

시는 겪는 것, 시는 질문

『인생의 역사』 표지는 박서보 화백의 '묘법 No.220411'이다. 국내 책 표지로는 처음으로 박서보의 그림을 썼다. 책 속 각-면-점-선-원-묘로 이어지는 챕터 구성과 어울리는 기하학적 이미지에, '인생' '역사' 등 테마와 잘 어울리는 톤의 작품이다. 박서보 화백의 아들인 박승호 기지재단 이사장은 그림을 책 표지에 사용해도 되는지 묻는 출판사 김민정 대표의 요청에 "안 되면 되게 할 거고, 되면 잘 되게 할게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박 이사장은 평소 시를 즐겨 읽는것으로 알려져있다. 사진 난다

『인생의 역사』 표지는 박서보 화백의 '묘법 No.220411'이다. 국내 책 표지로는 처음으로 박서보의 그림을 썼다. 책 속 각-면-점-선-원-묘로 이어지는 챕터 구성과 어울리는 기하학적 이미지에, '인생' '역사' 등 테마와 잘 어울리는 톤의 작품이다. 박서보 화백의 아들인 박승호 기지재단 이사장은 그림을 책 표지에 사용해도 되는지 묻는 출판사 김민정 대표의 요청에 "안 되면 되게 할 거고, 되면 잘 되게 할게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박 이사장은 평소 시를 즐겨 읽는것으로 알려져있다. 사진 난다

신형철은 요즘 보기 드문, 책 팔리는 평론가로 꼽힌다.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2008년), 영화 산문 『정확한 사랑의 실험』(2014년), 산문집『슬픔을 공부하는 슬픔』(2018년), 이런 전작들을 통해 꾸준히 팬덤을 넓혀 왔다. 이번 시화집도 예약판매 등으로 출간 직후 한때 교보 베스트셀러 9위에 오르기도 했다.

비로소 시로 돌아와 집중한 이번 책에서 신형철은 "시를 읽는 일에는 이론의 넓이보다 경험의 깊이가 중요하다"고 썼다. 인터뷰에서 "아무리 해도 이해되지 않던 시가, 어떤 경험 이후 어느 날 문득 너무나 쉽게 이해되거나 다르게 읽히는 경험을 하곤 한다"고 했다. 그래서 "시는 비밀을 품고 있는 압축된 문학이고, 그 비밀을 각자 다르게 읽어내며 (시의 비밀을)'들키게 하는' 거라 '겪는다'는 표현이 맞다"는 거다.

시는 질문이라고도 했다.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에 대한 글에 "누구도 시인들만큼 잘 묻기는 어렵다 (…) 인생은 질문하는 만큼만 살아"(87쪽)진다는 구절이 있다. 신형철은 "질문에 답이 있어야만 완성된다고 생각하지만, 질문을 품는 것만으로도 달라진다"며 질문의 중요성, 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핵심은 '사랑', 죽음을 대하는 태도까지 결정하는 것"

인생과 결부시킨 시 읽기는 책 목차에서도 드러난다. 고통‧사랑‧죽음‧역사‧인생, 5개 주제로 나눠 주제당 5편씩 시를 추리고 그에 관한 인생 이야기를 풀어냈다. 멀게는 '공무도하가', 새롭기로는 밥 딜런과 국내 가수 윤상, 가깝게는 이영광·박준의 시까지 다뤘다. 2016년 신문 연재글에는 없던 나희덕의 ‘허공 한 줌’을 넣었고, 프롤로그에는 독일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를 다뤘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2014년부터 교수로 재직했던 조선대학교를 떠나 올해 9월 서울대학교에 새로 자리를 잡았다. 지난 10일 인터뷰도 연구실에서 진행했다. 김경록 기자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2014년부터 교수로 재직했던 조선대학교를 떠나 올해 9월 서울대학교에 새로 자리를 잡았다. 지난 10일 인터뷰도 연구실에서 진행했다. 김경록 기자

이런 인생 강조에는 배경이 있었다. 올해 인생에 손에 꼽을 큰 변화를 겪었다고 했다. 지난 1월 아들 '신기룬'이 태어난 일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에게 말했다/당신이 필요해요//그래서/나는 정신을 차리고/길을 걷는다/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이런 문장의 브레히트의 시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를 다룬 글의 제목을 '조심, 손으로 새를 쥐는 마음에 대하여'라고 붙였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는 내가 필요하다.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 사랑은 내가 할 테니 너는 나를 사용하렴 (…) 그러므로 나는 죽지 않을게. 죽어도 죽지 않을게"라고 썼다.

신형철은 고통-사랑-죽음-역사-인생으로 이어지는 책 목차에서 가장 중요한 게 '사랑'의 위치라고 했다. 사랑은 "이 책의 심장"이라고 표현했다. "고통 뒤에는 사랑이 필요하고, 그 사랑도 죽음으로 깨지지만 죽음을 대하는 태도까지도 결정하는 게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당신이 이 세상에 살아있기를 원하는 단순하고 명확한 갈망"(96쪽)이라고도 했다.

“애도는 죽음을 바로 세는 데서 출발… ‘최대의 애도’ 해야”

몇 해 전 글들이지만, 최근 이태원 참사와 겹쳐 읽히는 대목도 있다. 영국 시인 W H 오든의 ‘장례식 블루스’에 대한 글이 그렇다. "우리 사회가 죽음을 애도하는 법을 잘 모르고 있다. 죽음을 셀 줄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애도의 출발"이라고 책에 썼다. 인터뷰에서는 "155명의 죽음이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155번 일어난 것이고, 그와 연결된 관계까지도 세어야 한다"며 "애도는 ‘최대의 애도’, 할 수 있는 걸 다 해야 하는데 지금은 ‘최소 애도’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애도행정'이 너무 부족하다”고 아쉬워했다.

신형철은 공감에는 정서적 공감과 인지적 공감이 있다고 말했다. "정서적 공감은 인지적 공감의 양에 비례한다.” 이해함으로써 느낀다는 말이다. 그는 "인지적 공감(이해)은 노력과 훈련이 필요한데,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에 들어갈 기회가 없으니 대신 문학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예술-윤리-비평 가운데 그 어드메… “유명보다는 고유했으면”

신형철은『인생의 역사』 저자 소개 마지막 문장에 '관심사는 예술의 윤리적 역량, 윤리의 비평적 역량, 비평의 예술적 역량'이라고 썼다. 국문학을 전공했지만 여러 문학을 읽고 오가며 비평활동을 했고, 결국 비교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그의 방향성을 설명하는 한 줄이다. 사진 난다

신형철은『인생의 역사』 저자 소개 마지막 문장에 '관심사는 예술의 윤리적 역량, 윤리의 비평적 역량, 비평의 예술적 역량'이라고 썼다. 국문학을 전공했지만 여러 문학을 읽고 오가며 비평활동을 했고, 결국 비교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그의 방향성을 설명하는 한 줄이다. 사진 난다

책에 실린 저자 소개에 알쏭달쏭한 문장이 있다. "관심사는 예술의 윤리적 역량, 윤리의 비평적 역량, 비평의 예술적 역량이다." 수식어를 걷어내면, 예술·윤리·비평이 남는다. 예술과, 예술에 관심 갖는 비평 작업에 일정한 윤리가 필요하다는 관점은 상식에 속한다. 신형철은 "잡다하게 읽고 잡다하게 연구하다 보니, '전공이 없는 사람'이 돼버린 것 같은 느낌이 있다”며 “정체성이 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의 답을 정리한 문장”이라고 설명했다.

"유명해지는 건 심리적으로 불편해지는 지점이 있고 한계가 있다. 유명해지는 것보다는 유일해지고 싶다”며 “(내 평론이) 유일무이까지는 아니더라도 가급적 고유한 것이면 좋겠다”고 했다. “책에서 기대하는 건 보통 '내 고민, 내 질문과 스파크가 생기는 딱 한 문장'인데,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그 ‘한 문장’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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