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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도 "박원순 성희롱 맞다"…재판부가 본 '사랑해요' 의미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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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희롱을 인정한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치에 대해 법원이 적절했다고 판단했다. 15일 서울행정법원 행정8부(이정희 부장판사)는 박 전 시장의 배우자인 강난희씨가 국가인권위원회의 처분을 취소해달라고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위치한 서울행정법원. 뉴스1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위치한 서울행정법원. 뉴스1

재판부는 인권위의 권고 결정이 절차적·실체적으로 위법한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인권위는 지난 2020년 7월 30일 직권 조사를 결정한 뒤, 지난해 1월 박 전 시장의 성희롱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서울시장 등에게 피해자 보호 방안 등을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재판부는 인권위가 성희롱으로 판단한 부분에 대해 모두 ‘성희롱이 맞다’고 봤다. 박 전 시장이 피해자에게 부적절한 메시지와 사진, 이모티콘을 보내거나 네일아트한 손톱과 손을 만진 것은 성희롱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박 전 시장의 행위가 성적 굴욕감과 불쾌감을 주는 정도에 이르러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봄이 타당하다”며 “성희롱이 장기간에 걸쳐 여러 번 행해져 피해자에게 정신적인 고통을 주었다”고 지적했다. 또 “성희롱 행위가 업무 공간이나 텔레그램 대화방에서 이뤄졌으며,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하는 행위가 주된 부분을 차지했다”고 짚었다. 피해자가 거부 의사를 표현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강씨 측은 피해자의 평소 행동을 근거로 성희롱이 아니라고 주장해왔지만, 재판부는 많은 분량을 할애해 이 주장을 기각했다. 재판 과정에서 강씨 측은 피해자가 박 전 시장을 존경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쓰거나 박 전 시장과의 셀카(셀프카메라) 촬영을 즐거워한 것, 박 전 시장의 생일파티를 주도하며 친밀함을 표시한 점 등을 제시한 바 있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대응 방식은 오히려 직장 내 성희롱 사건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으로 보인다”고 했다. “박 전 시장이 피해자의 신분상 지위를 좌우할 수 있는 위치에 있고, 피해자는 이 사실을 공론화할 경우 직무상·업무상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오랜 시간 박 전 시장의 성희롱을 묵인해 온 것은 “시장의 심기를 보살피는 비서 업무의 특성상 박 전 시장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며 불편함을 자연스럽게 모면하려는 노력“으로 봤다.

재판부는 또 “강씨 측 주장에 따르면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는 피해를 보면 즉시 어두워지고 무기력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는 성희롱 피해자들의 양상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이어 재판부는 “피해자가 비서직 공무원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조금이라도 차질을 주지 않기 위한 소명의식 내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경력을 쌓기 위한 차원에서 내키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성희롱 피해를 감수하는 측면이 있음을 피해자의 입장에서 다방면으로 충분히 고려할 필요도 있다”라고도 했다. 또 “성희롱 피해를 본 수치심으로 피해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존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재판 과정에서 강씨 측 변호인은 피해자가 박 전 시장에게 ‘사랑해요’, ‘꿈에서는 돼요’ 등의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지만, 재판부는 피해자 측 주장에 무게를 실었다. 당시 ‘사랑해요’는 “피해자가 속한 부서에서 동료들 내지 상·하급 직원 사이에 존경의 표시로 관용적으로 사용됐다”는 것이다. ‘꿈에서는 된다’ 메시지 역시 “피해자가 박 전 시장의 성적 언동을 회피하고 대화를 종결하기 위한 수동적 표현으로 보인다”고 했다. “피해자가 밉보이지 않으면서 박 전 시장을 달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말로 해석될 여지가 많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성희롱 가해자가 사망한 경우 피해자에 대한 반론권이 보장되지 않는 측면이 있어 공공기관에서의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할 때는 신중히 처리할 필요가 있다”면서도 “객관적인 자료나 관련자들 진술과 일치하는 진술까지 함부로 배척할 수 없다”고 했다. 인권위가 참고인들의 진술과 텔레그램 메시지 등 증거를 갖고 적법하게 결정했다는 취지다.

지난 2020년 7월 30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전원위원회실에서 열린 제26차 상임위원회에서 최영애 인권위원장을 비롯한 상임위원들이 회의에 참석해 있다. 이날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에 대한 국가인권위원회의 직권조사 여부가 결정됐다. 뉴스1

지난 2020년 7월 30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전원위원회실에서 열린 제26차 상임위원회에서 최영애 인권위원장을 비롯한 상임위원들이 회의에 참석해 있다. 이날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에 대한 국가인권위원회의 직권조사 여부가 결정됐다. 뉴스1

인권위 조사에 절차적으로도 문제가 없다고 봤다. 인권위는 인권침해나 차별행위를 시정하는 데에 필요한 구제조치를 할 수 있는 만큼, 형사 사건이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됐다는 이유만으로 인권위가 사건을 각하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판단했다.

다만 재판부는 강씨가 이 같은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다고 판단했다. 박 전 시장이 성희롱 행위자로 인정돼 배우자 강씨의 추모감정 등이 침해될 수 있고, 이를 법적으로 구제받고자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날 법원을 찾은 강씨는 재판부의 판결 요지를 들은 뒤 아무 말 없이 법정을 떠났다. 강씨 측 이종일 변호사는 “예상치 못한 결과라 매우 당황스럽고 깊은 유감을 표하고 싶다”며 “강씨와 항소 여부 등을 상의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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