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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음 읽기

동행(同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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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달이 너무 좋아서인지 세상이 서글퍼서인지, 책을 읽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그저 고단하게만 느껴지는 만추(晩秋)의 밤. ‘오늘은 저 달이 나의 벗이로구나.’ 찬 기운에 옷깃을 여미고 법당 앞 탑전을 서성이니 둥근 달이 더 환히 비춘다. 저것은 달인가, 거울인가. 아니면 염라대왕의 업경대인가. 그리운 마음으로 바라보니 추억을 비추고, 마음을 돌이켜 가다듬으니 비구니의 단아한 마음을 비춘다. 달은 그저 똑같은 달일 뿐인데, 저 혼자 이랬다저랬다 하니 나도 모르게 헛헛한 미소가 지어진다.

시월 내내 도량을 곱게 장엄했던 색색의 국화도 어느덧 잎은 마르고 향기로 남아 내게 다가온다. 차가운 달빛 아래 맞이하는 만추의 농염한 국향이라니. 모든 것을 내려놓은 줄로만 알았더니, 늦가을에 외롭지 말라고 애써 곁에서 동행해주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이 밤 또한 쉬이 잠들긴 그른 모양이다. 『베갯머리 서책』에 이르길, ‘늦은 밤에도 잠 못 이루는 승려는 불안’한 법이라던데, 이렇듯 만추에 잠 못 이루는 나 자신이 그 불안하고 못난 승(僧)인 게다.

평생 누군가와 함께하는 우리 삶
탁마하며 격려해준 도반같은 이
마음 터놓고 속 나눌 동행 있는가

기실 달구경이나 하며 넋두리할 때는 아니다. 사바세계는 온통 슬프고, 그런 중에 절집에선 동안거(冬安居)가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동안거란 음력 10월 15일부터 이듬해 1월 15일까지 3개월 동안 스님들이 수행에 전념하는 기간을 말한다. 바깥일이 많은 내겐 그리 큰 영향이 없지만, 그래도 안거는 수도승에게 큰 울타리가 되어준다.

동안거를 나기 위해 스님들이 각자 원하는 처소에 운집했다. 선원(禪院)에는 참선할 스님들이, 강원(講院)에는 간경(看經)할 스님들이, 기도처에는 기도할 스님들이 모였다. 다행히 그곳에는 함께하는 도반(道伴)도 있다. 도반이란 함께 도를 닦는 벗, 수행길의 동행을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도반을 가리켜 출가자가 걸어가는 이 길의 전부라고 하셨다. 도반들끼리는 서로 탁마(琢磨)하며 격려해 주고, 힘이 되어 주기에 그렇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평생 누군가와 함께한다. 매 순간은 아니어도 시시때때로 동행이 존재한다. 일상에서의 동행뿐만 아니라, 이국땅에서는 낯선 외국인이 동행이 되고, 우연히 기차 옆자리에 앉은 이가 동행이 되며, 앞에서 강의를 듣던 이가 동행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더러는 저승길에도 동행이 있다.

‘백아절현(伯牙絶絃)’이라 했던가. 이쯤에서 『여씨춘추』 ‘열자’에 나오는 고사를 꺼내지 않을 수 없겠다. 별빛도 사라진 깜깜한 그믐밤, 백아가 어둠 속에서 은은한 달빛을 연상하며 거문고를 뜯는데, 그의 벗 종자기가 말했다. “아, 달빛이 참으로 곱구나.” 종자기는 백아가 어떤 곡을 연주하든 마음을 꿰뚫어 소리의 뜻을 알았다. 어느 날엔 태산을, 어느 날엔 출렁이는 강물을 알아차렸다. 그런 벗이 죽자 백아는 그의 무덤가에서 구슬픈 곡을 연주하고는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고 한다.

좋은 일이나 불행한 일에 함께 웃고 우는 지음(知音)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러기엔 세상은 혼잡하고 시끄럽고 각박하며 인정 사나울 때도 많다. 마음 터놓고 속을 나눌 동행이 있다면 행복한 일이리라. 그만큼 내가 짓는 인연 또한 소중할 터이고.

『법구비유경』에 이런 글이 있다. ‘무엇이든 본래는 깨끗하지만, 모두 인연 따라 죄와 복을 일으키게 된다. 현명한 이를 가까이하면 도의 뜻이 높아지고, 어리석은 이를 가까이하면 재앙이 온다. 마치 향을 쌌던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생선 묶었던 새끼줄에서는 비린내가 나는 것과 같아서, 차츰 물들어 친해지면서도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렇다. 새들도 숲을 가려 내려앉는다는데, 하물며 사람이랴. 살아가면서 누구와 인연을 맺고 동행할지는 매우 중요하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만추’라는 영화다. 수감된 지 7년 만에 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특별휴가를 받은 여자와 누군가에게 쫓기는 남자의 동행. 제목에 끌려서 봤는데, 여배우의 스산한 표정과 쓸쓸한 음색이 만추에 어울렸다. 물론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면야 옳고 그름이 있겠지만, 더러는 그 기준도 모호해진다. 특히 슬픔에 빠진 이가 불행한 상황에서 낯선 이와 동행한대도 마음 열고 함께할 수 있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아무렴 어떠한가, 맑은 바람 스치는 만추에 동행이 있다면 그대는 다행하다.

백 년 생사에 누가 지기인가(百年生死誰知己)/머리 돌리니 가을바람 불어 홀로 눈물 흩뿌리네(回首西風淚獨潸)

이행(李荇)의 ‘차중열운(次仲說韻)’ 중-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