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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삼성화재배 결승 진출…여성 기사 최정이 이룬 것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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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최정 9단이 8일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결승 3번기 2국 경기를 펼치고 있다. [뉴스1]

최정 9단이 8일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결승 3번기 2국 경기를 펼치고 있다. [뉴스1]

바둑은 남녀가 함께하는 종목이지만 프로랭킹 100위 안에 여자기사는 3명뿐이다. 많은 이들이 묻는다. 바둑은 힘으로 하는 게 아니니까 여자와 남자가 비슷하게 겨룰 수 있는 종목이 아닐까. 아니다. 그럴 것 같은데 안 된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지목되지만 가장 큰 것은 역시 자신감 문제다. 여자는 소수고 어려서부터 밀린 탓에 심리적으로도 밀린다. 승부란 마주 앉을 때 질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 이길 가망은 거의 없다.

이번 삼성화재배에서 여자기사 최정 9단이 거둔 주옥같은 승리와 기록들은 이같은 통념과 선입견을 산산조각냈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가 있다. 최정은 32강전 사다 아쓰시 7단에 이어 16강전에서도 일본기사 이치리키 료 9단을 꺾었다. 이치리키는 세계대회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는 다른 일본기사들과 달리 항상 세계대회에 당당히 출전했고 성적도 일본기사 중 가장 좋았다. 지난해에는 드디어 일본 최고 자리인 기성에 올랐다. 인기도 최고다. 그런데 한국 27위의 여자기사에게 졌으니 많이 괴로웠을 것이다.

이치리키를 꺾었다 해도 그 대국은 행운이 따라준 결과였다. 8강전 양딩신 9단과의 대국은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양딩신은 신진서 9단과 팽팽한 전적을 유지해온 중국의 강자다. 더구나 전투적인 이치리키와 달리 침착하기 그지없고 수비에도 능하다. 한데 전혀 예상 밖의 광경이 펼쳐졌다. 이번 대국은 결과뿐 아니라 내용마저 훌륭했다. 처음엔 조금 밀리는 분위기였지만 공격의 기회를 잡자 강력하게 밀어붙여 승리를 낚아챘다. 양딩신의 탈락으로 중국은 일찌감치 전멸했다. ‘중국을 침몰시킨 한국의 바둑여제 최정’은 이날 중국 네티즌의 화제였다. 최정은 말했다. “4강 진출은 예상 못 했지만 이렇게 미친 듯이 이기고 싶다는 마음이 든 건 참 오랜만이다.”

언론은 중국의 루이나이웨이 9단이 30년 전 세운 ‘세계 4강’을 최정이 이뤘다며 격찬했다. 그러나 루이나이웨이는 응씨배 세계 4강에 오르며 ‘마녀’라는 별명도 얻었다. 여자가 정상적으로 세계 4강에 오를 수 있겠느냐, 신들린 여자이기에 가능한 것 아니냐 하는 의미였을까.

최정은 이튿날 한국 2위 변상일 9단마저 꺾고 드디어 결승에 진출했다. 초반에 대마를 잡았으니 내용은 다른 어떤 판보다 완벽했다. 여자기사 최초의 세계대회 결승진출이 이렇게 이루어졌다. 남자 세계 1위 신진서와 여자 세계 1위 최정이 결승에서 맞붙는 바둑사의 이정표가 새롭게 새겨졌다.

여자바둑은 이로 인해 달라질 것이다. 한국은 ‘일본바둑은 강하다’는 고정관념을 힘겹게 깨뜨리며 세계정상에 섰다. 마찬가지로 여자기사들의 뇌리에 깊이 박힌 ‘남자에게는 힘들다’는 선입견도 깨져 나갈 것이다. 그걸 최정이 보여줬다.

최정은 어려서 아버지에게 바둑을 배웠다. 싹수를 본 아버지는 광주에서 서울로 이사했고 유창혁바둑도장에서 공부했다. 도장이 분당으로 이사하자 최정도 분당으로 갔다. 유창혁 9단은 이런 말을 한다. “여자기사는 본능적으로 남자에게는 어렵다는 느낌을 갖는다. 정이는 어려서부터 남자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게 이번 결승진출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이제 최정이 해냈으니 다른 여자기사들도 달라질 것이다. 승부에서 자신감이란 참으로 놀라운 존재다. 반전무인(盤前無人)을 승부사 최고의 경지로 꼽는 것도 겁을 먹는 순간 이길 수 없다는 게 승부세계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최정은 “유성에서 열리던 대회의 추억이 참 좋아요. 그래서인지 다른 어떤 대회보다 삼성화재배에서 우승하고 싶었어요”라고 말했었다. 신진서와의 결승전은 아쉽게 패배로 끝났다. 최정의 꿈은 다음으로 미뤄졌다. 하지만 최정이 이룬 결승진출의 쾌거에 다른 수많은 여자기사들은 가슴이 뛰었을 것이다. 잊고 있었던 새로운 목표가 가슴에 새겨졌을 것이다. 어쩌면 이로 인해 여자바둑은 새롭게 도약하여 남자와 동등한 경지에 이를지도 모른다.

박치문 바둑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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