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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재의 ESG인사이트]그리고 돌아오지 못했다

중앙일보

입력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

핼러윈 축제에 갔던 자식들이 돌아오지 못했다. 남겨진 부모들도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생때같은 자식,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들이 돌아오지 못한 마당에 일상으로 돌아올 부모는 세상에 없다.

참척(慘慽)의 고통이 천붕(天崩)의 그것보다 가공할 만큼 참혹하다고 말한다. 그 고통엔 만기도 시효도 없다. 가슴에 묻어 자신의 호흡이 끝날 때까지 자식과 함께 호흡하기 때문이다. 이래서 청춘의 죽음에는 부모의 참척이 포개져 거대한 무게로 우리 폐부 곳곳을 후벼 판다. 백오십육 명 청춘의 죽음은 백오십육 번이나 우리 가장 예민한 신경을 도려내고 찌른다. 청춘의 죽음 앞에는 명복을 빈다는 말조차 헛헛하고 허허롭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인생의 역사’에서 오든(W.H. Auden)의 ‘장례식 블루스’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5000명이 죽었다는 것을 ‘5000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000번이나 일어났다’가 맞다.” 10월 29일 하루 동안 한 장소에서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백오십육 번이나 일어났다.

일터로 출근한 자식들도 돌아오지 못했다. 그날 자식의 뒷모습도 못 본 부모, 그날 자식의 생일조차 못 챙긴 부모, 자식과의 그 어떤 약속도 못 지킨 부모는 ‘그 못한 것’을 한으로 품고 여생을 산다. 부모만이 공감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그 현장의 모습을 알면 더 무너져 내린다. 그들은 일터에서 떨어져 죽고, 끼여 죽고, 불타 죽고, 숨 막혀 죽고, 잘려 죽고, 깔려 죽고, 나르다 죽고 돌아오지 못한다. 백혈병, 폐암, 진폐증, 천식, 중금속 중독, 심근경색 등의 직업병을 얻어 돌아오지 못한다.

지난 10월 15일 파리바게뜨 제빵을 생산하는 평택의 SPL 공장에서 23세 여성 박모씨가 배합기에 낀 채로 돌아오지 못했다. 12시간 밤샘 근무 막바지인 새벽 6시 15분의 참사였다. 2018년 12월 10일 한국서부발전의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한국발전기술 소속의 24세 남성 김모씨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돌아오지 못했다. 새벽 3시 20분의 참사였다. 2016년 서울메트로의 외주업체 직원인 19세 김모씨가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중 달려오던 열차와 도어 사이에 끼여 돌아오지 못했다. 오후 5시 57분의 참사였다. 세 청년 모두 외주업체에서 비정규직으로 과중한 업무를 수행하다 돌아오지 못했다.

이들 세 청년만이 아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20년 한 해에만 국내 산업현장에서 882명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100만 명당 17.01명이다. 영국과 비교해 보면 천양지차다. 영국 보건안전청(HSE)에 따르면 2019년 영국의 100만 명당 사망자 수는 한국의 10분의 1수준인 1.62명에 불과했다. 한국은 OECD 38개 국가 중에서도 산재 사망 다발 국가에 속한다. 2017년 기준 국내 근로자 10만 명당 사고 사망자 수는 3.61로 회원국 평균 2.43을 훌쩍 뛰어넘고, 캐나다(5.84), 터키(5.17), 칠레(4.04), 룩셈부르크(3.69)에 이어 다섯 번째로 높았다. 건설산업 10만 명당 사고 사망자는 OECD 평균 8.29의 세배 이상인 25.45로 회원국 중 가장 높았다.

왜 이럴까. 왜 한국에서는 수많은 자식이 돌아오지 못하는가. 왜 이것으로 여전히 세계 최고일까.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한강의 성장 신화가 사회적으로 강화 학습(reinforcement learning) 됨으로써 그다음 단계인 성숙으로의 이행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성장 신화의 주역들인 6070이후 세대들이 성숙으로의 이행을 막는 주역들이기도 하다. 그들 어릴 적 너무 배고팠고 못 살았다. ‘굶어 죽는 것’보다 ‘일하다 다치거나 죽는 것’이 상대적 미덕으로 간주되었다. 그 당시 전자는 게으름과 무능을 표상했지만 후자는 사회적 후생 증대를 위해 살신성인한 ‘산업 전사(戰士)`라고까지 칭송되었다. ‘전사’는 일하다 죽을 수도 있다는 뉘앙스마저 풍기지 않는가?

성장 일변도의 우리 모습에 대해 ‘눈 떠보니 선진국’의 저자 박태웅은 이렇게 되묻는다. “서른이 넘은 사람이 아침저녁 키를 잰다면 어떨까?” 웃플 것이다. 벽에 키를 재는 것은 청소년기까지다. 그 이후에는 내면의 깊이와 넓이를 재야 하지 않을까. 성장에 이은 성숙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아침저녁으로 키를 잰다. 경제 규모의 키, 매출과 이익의 키, 공기(工期)의 키, 인건비의 키, 작업시간의 키 등이 그것들이다.

이러한 시대착오적 측정 잣대는 여전히 기업을 단기 효율과 생산성 극대화로 내몬다. 과정 절차는 경시되고 성과와 결과물이 중시된다. 빨리빨리의 속도 문화는 지체와 지연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고질적 갑을 구조하에서 중소 하청업체는 비용 절감의 대상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공기는 앞당기고 인력은 줄여야 하며, 위험한 일은 하청업체가 떠맡아야 한다. 이른바 위험의 연쇄적 외주화와 비용 전가의 낙수효과가 발생한다. 이쯤 되면 하청업체에서는 ‘사람=비용’의 등식이 성립한다. 과잉 노동, 미숙련노동, 급속 노동, 매뉴얼 부재의 노동 등이 일상화된다. 이 모든 노동이 어처구니없는 산업재해의 온상지다. 자식들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 이번 참사를 계기로 진짜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즉시 실행에 옮겨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희생자들에 대한 살아 있는 자들의 최소한의 도리와 과제가 아닐까. 그리하려면 이제 분노와 슬픔도 거두고, 야만적 정쟁도 멈추고, 특정 진영의 전유물이 아닌 우리 공동의 치열한 시대적 과제로 끌어안고 하나하나 고쳐 나가야 한다. 가장 먼저 공정한 거버넌스를 갖춘 특별 대책 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 해당 위원회에서 성역 없이 진상을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관련 책임자에게 상응한 벌을 내려야 한다. 희생자에 대한 적절한 보상도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재발 방지를 위한 구체적이고 철저한 대책도 수립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진행 과정들을 여러 소셜 미디어들을 통해 투명하게 생중계하라!

기업 차원에서도 크게 변해야 한다. 최근 ESG 경영에 대한 기업들의 높은 관심은 일단 긍정적이다. 하지만 형식적 보여주기식 ESG 경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한국 맥락에 부합하는 실질적 ESG 경영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ESG 경영의 중대 이슈인 ‘산업 안전 및 보건 수준’의 제고다. 그 핵심성과지표(KPI)로는 ‘산업재해 발생 빈도 및 사고 사망자 수’가 될 것이다. 이것을 지속적으로 낮춰 나가는 것이 한국 기업들을 ‘성장의 단계’에서 ‘성숙의 단계’로 업그레이드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글로벌 ESG 투자자들 역시 한국 기업들의 이 부분을 예의주시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청춘들이 두 발로 걸어서 핼러윈 축제를 갔다면 다시 두 발로 돌아와야 한다. 그렇게 여행을 떠났다면 그 모습 그대로 돌아와야 한다. 멀쩡하게 출근했다면 멀쩡한 얼굴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청춘은 특히 우리 미래의 소중한 조각들인 까닭이다. 한편 경제도 ‘살림살이’를 위한 경제만이 아니라, ‘삶’과 ‘사람’을 위한 그것으로 환골탈태해야 한다. ‘돈벌이 수준’만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안전 수준’도 함께 측정·관리되어야 한다. 그런 사회와 나라를 만드는 것이 돌아오지 못한 그들을 향한 ‘참 제단(祭壇)’을 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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