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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종석의 살아내다

"이태원 참사, 지금 할일은 딱 하나" 정신과 전문의의 호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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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석 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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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주원 기자

그래픽=김주원 기자

지난 29일 밤 서울 이태원에서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푸릇한 어린 청춘들에게 벌어진 거짓말 같은 소식에 아마 모든 국민의 마음이 무거우실 겁니다. 이렇게 엄청난 재난을 마주하면 사람들은 먼저 비현실감을 느낍니다. 이게 현실이라고? 설마~, 누군가의 도를 넘은 장난이거나 누군가 지어낸 픽션이겠지, 라며 부정하고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먼저 듭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감았다 다시 떠봐도 달라지는 사실은 없고, 이 끔찍한 불행이 현실이라는 걸 깨닫게 되면 그다음엔 극심한 슬픔과 불안이 우리를 덮칩니다. 이런 재난 상황에서 슬픔은 아주 쉽게 전파되고 또 왜곡되거든요. 또 그렇게 왜곡된 어떤 슬픔은 사람의 분노를 유발하고 조장하기까지 합니다. 그 결과 피해자와 가족을 넘어 우리 사회 전체가 외상 후 스트레스 증세(PTSD)를 겪습니다. 자면서 악몽을 꾸거나 일상생활 중에도 쓸데없이 끔찍한 상상이 떠오르면서 재난 상황을 반복해서 경험하는 겁니다. 가령 '이태원'이나 '핼러윈'이란 단어만 들어도 공황에 빠져 숨을 몰아쉬거나, 유튜브나 방송에서 핼러윈 관련 얘기만 나와도 심장이 빠르게 뛰는 과 각성 증세를 나타내는 식입니다. 적잖은 사람들은 아예 "나는 앞으론 이태원 근처에도 안 갈래"라며 회피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집단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예방하기 위해, 살아남은 우리의 역할이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쩌면 재난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재난 이후 사람들의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과거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지진이나 압사·총기 사고 등 각종 재난 당시 그러했듯이 재난 그 자체보다 여기서 파생한 ‘분노의 연쇄’가 더 큰 사회적 문제를 낳습니다. 어떤 이들은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미워할 대상을 찾는데, 일부 언론도 이에 동조해 책임론 운운하며 기어이 희생양을 찾아내곤 합니다. 심지어 이 재난 자체를 제멋대로 정치적으로 해석해 자기가 속한 집단의 위기를 타개할 기회, 혹은 다른 집단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행태까지 보이곤 합니다. 이태원 참사가 벌어지자마자 벌써부터 그런 조짐이 곳곳에서 감지됩니다.

그 악순환 탓에 사람들은 또 패닉에 빠지고 집단 공황 상태가 됩니다. 불안과 우울, 분노에 전염되면서 평소보다 쉽게 음모론에 휘둘립니다. 이러한 미움과 원망, 비난의 분위기는 또 다른 사고와 재난으로 이어질 우려도 큽니다. 원래는 조용히 피해자와 가족을 위로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이겠으나 정신과 전문의의 한 사람으로서 이런 추가적 아픔이 연쇄적으로 이어지지 않기 바라는 심정으로 지금 우리가 겪는 재난 상황에서 우리가 갖춰야 할 마음을 몇 가지로 적어봅니다.

1. 왜 이런 일이 벌어졌지? 지금은 그걸 궁금해하고 원인을 파헤치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트라우마 직후에는 그저 모두가 같이 아파하고 서로를 위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널리 퍼져 모두의 아픔이 반복됩니다.

2. 핼러윈 파티에 가서 사고를 당한 어린 친구들을 함부로 비난하지 마십시오. 내 가족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또 어디에서나 벌어질 수 있는 그저 불행한 사고일 뿐입니다. 젊은 세대에게 훈계할 일이 아닙니다. 당신의 개인적인 판단이나 생각은 잠시 접어두세요.

3. 응당 마련했어야 할 대책이나 앞으로의 재발 방지에 대해 굳이 설교하려면 슬픔과 애도, 존중의 시기가 끝나고 하시지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기간은 최소 두 달 이상입니다. 적어도 이 동안에는 함부로 남 탓이나 비난을 해서 쓸데없는 불신과 분노를 조장하지 마십시오.

4. 이 슬픔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 제발 제발 멈춰주십시오. 온 국민이 경건히 피해자와 가족을 위로해야 할 이 시기에, 이미 누군가 그리한 것처럼 또 누군가는 분명히 이 재난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세우고, 다른 정당을 비난하는 수단으로 이용할 것이기에 두렵고 개탄스럽습니다. 아니, 비단 정치뿐 아니라 그 무엇으로도 이용하려는 마음을 버리십시오. 이 슬픔을 이용해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홍보하고 영상 조회 수를 올리려는 소시오패스(반사회성 성격 장애)가 있다면 자중하시길 부탁드립니다.

5. 타인의 아픔과 불행에 대해 제삼자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피해자와 가족들의 삶을 존중하고 아픔을 보듬는 것입니다. 남은 우리의 역할은 누군가를 비난하고 조금이라도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들을 색출해내는 게 아니라 정반대로 이런 분노의 연쇄를 막고 우리 사회가 집단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빠지지 않도록 각자의 역할을 되새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국 화가 시메온 솔로몬(1840~1905)의 '트와일라이트, 피티 & 데스(Twilight, pity and death)'.

영국 화가 시메온 솔로몬(1840~1905)의 '트와일라이트, 피티 & 데스(Twilight, pity and death)'.

심지어 사고 직후 SNS엔 핼러윈 축제를 없애자, 이태원 출입을 막자와 같은 왜곡되고 극단적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입니다. 이런 편향된 생각을 강요하는 게 과연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타인에 대한 비난, 근거 없는 불신과 원망은 제2, 제3의 재난을 불러올 뿐입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를 극복하려면 그저 피해자와 가족이 아픔을 극복할 수 있도록 최소 2~6개월간 옆에서 위로와 버팀목이 돼주면 됩니다. 언성을 높여 누군가를 비난하지 말고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민합시다. 자신은 마치 아무 흠결도 없는 도덕군자라서 이 사태와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한쪽에 서서 누군가를 훈계하고 공격할 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임이고 모두의 불행이라는 걸 겸허하고 엄숙히 수용하고 아픔을 인내합시다. 피해자와 가족이 천천히 회복하는 과정을 묵묵히 지원하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차분하게 실용적 지혜를 모아야 할 것입니다.

모두의 아들, 딸이 그날 밤 그곳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날카로운 말을 멈추고 함께 아파하고, 같이 견뎌냅시다. 슬픔의 연쇄를 막기 위해 오늘 하루만이라도 모든 사람이 비난을 멈추고 서로를 경건히 위로하는 날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재난을 이겨낼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존중과 공감에서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또한 그것이 황망하게 져버린 어린 청춘들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