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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궁녀 외로움 달랜 귀뚜라미, 노인 인지력 향상 도움

중앙일보

입력

“귀뚜라미를 키우는 게 생각보다 재밌고, 소리도 듣기 좋아. 오늘 복지관에 갔더니 다들 모여서 귀뚜라미 얘기를 해. 귀뚜라미가 다 죽었다고 빈 통 가져온 사람도 있더라. 우리 집 귀뚜라미는 잘 크고 있는데 말이야. 그래서 난 잘하고 있다고 자랑했더니 부러워하더라고.” 왕귀뚜라미 돌보기 프로그램에 참여한 73세 할머니가 관찰일지에 적은 글이다.

가을밤 정적을 가르는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아련한 추억에 잠겨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가을이 왔음을 알리는 대표적인 곤충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안정을 찾으면서 옛 추억을 회상할 수 있게 만든다. 실제로 고려 시대의 문인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에 ‘가을이 돌아오면 궁중의 여인들은 작은 금롱 안에 귀뚜라미를 잡아넣었다. 이 금롱을 베개 옆에 놓고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를 즐겼다’는 문장을 남겼다. 고려 시대 궁중의 여인들은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구중궁궐 속 외로움을 달랜 것이다.

최근 치유농업의 한 분야로 정서 곤충이 주목받고 있다. 어린 시절 놀거리가 부족했던 중장년층에게는 곤충을 가지고 놀던 추억이 막연하게 남아 있다. 메뚜기, 잠자리, 물방개, 땅강아지 등 들판에 지천으로 널린 곤충은 아이들에게 장난감이자 친구였다. 벌레라면 징그럽다고 난리를 치는 요즘 아이들도 나비나 사슴벌레 등의 곤충은 큰 거부감없이 대한다.

농촌진흥청은 최근 왕귀뚜라미, 호랑나비, 누에, 장수풍뎅이 4종의 정서 곤충을 이용한 치유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효과를 확인하였다. 곤충이 치유에 얼마나 큰 효과가 있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효과는 예상외로 크다.

2개월 동안 왕귀뚜라미 돌보기 체험을 한 65세 이상 노년층 대상의 실험 결과 인지기능은 26.7에서 28.1로, 정신적 삶의 질은 73.4에서 78.3으로 증가했고, 우울증 지수는 3.9에서 3.1로 감소했다. 초등학교 3학년 학생 167명을 대상으로 한 호랑나비 치유 실험에서 삶의 만족도는 7.17에서 7.60으로 증가했고, 스트레스 지수는 17.48에서 15.98로 줄었다.

5회차로 구성된 호랑나비 치유프로그램은 아이들이 알에서 깨어나고 애벌레와 번데기 과정을 거쳐 나비가 되는 과정을 직접 관찰함으로써 생명의 경이로움과 소중함을 느끼게 한다. 호랑나비의 성장 과정을 관찰하면서 그 느낌을 글이나 그림, 음악으로 표현하고 나비의 생태를 자연스럽게 학습시키면서 나비와 친구가 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은 구성되어 있다.

아이들이 쓴 관찰일지에서 날개를 펴고 날아간 호랑나비에게 ‘고마웠어’, ‘함께 해서 행복했어’, ‘안전한 곳에서 건강하게 살아’와 같이 친구처럼 대하는 마음이 보인다. 치유프로그램 과정에서 생명과 친구의 소중함을 느낀 아이들이 학교생활에서 친구와 어떤 관계를 형성할지는 굳이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곤충 치유프로그램 개발 전문가인 국립농업과학원 곤충양잠산업과 김소윤 박사는 “농식품부 고시에 지정된 애완곤충 종은 75종이지만 현재 활용되는 종은 10여 종에 불과해, 치유용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곤충 종 확장과 대상별 맞춤형 곤충 치유프로그램 개발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하며, “주로 실내에서 진행하던 곤충 치유프로그램도 농가형, 생태원형 등으로 개발하고 치유프로그램의 의과학적 치유 효과도 함께 구명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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