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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맥경화' 채권시장에 '50조+α' 푼다…채안펀드 1.6조 바로 투입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정부가 회사채와 단기자금시장의 자금경색 해소를 위해 50조원 이상의 유동성을 공급하기로 했다. 강원도의 레고랜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채무 불이행 사태가 촉발한 채권시장의 ‘신뢰 위기’를 진화하기 위해서다. 최고 신용등급(AAA) 채권의 미매각이 속출하고, 단기기업어음(CP) 금리가 급등하는 등 채권 시장은 몸살을 앓고 있다.

비상 거시경제 금융회의 결과 발표하는 추경호 경제부총리   (서울=연합뉴스) 황광모 기자 =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가운데)을 비롯한 경제부처장들이 23일 오후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비상 거시경제 금융회의를 마친 뒤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비상 거시경제 금융회의 결과 발표하는 추경호 경제부총리 (서울=연합뉴스) 황광모 기자 =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가운데)을 비롯한 경제부처장들이 23일 오후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비상 거시경제 금융회의를 마친 뒤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와 한국은행은 23일 서울 은행회관에서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를 열고 ‘50조원+α’ 규모의 시장안정조치를 발표했다. 이날 회의는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이창용 한은 총재, 김주현 금융위원장,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최상목 대통령실 경제 수석 등이 참석했다.

추 부총리는 “정부와 한은은 대내외 복합 요인으로 인해 현재의 시장 상황이 매우 엄중하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하면서, 필요시에는 가용한 정책수단을 총동원해 시장 불안에 적기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정부 대책은 채권시장 유동성 공급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총 20조원 규모의 채권시장안정펀드(채안펀드)를 조성해 투입할 방침이다. 우선 24일부터 채안펀드 가용재원 1조6000억원을 활용해 회사채와 기업어음(CP) 매입을 재개한다. 매입 대상에는 시공사가 보증한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도 포함된다. 나머지 채안펀드 재원은 각 금융기관에 자금요청(캐피털콜)을 해 증액할 방침이다.

또한 산업은행·기업은행·신용보증기금 등 정책금융기관의 회사채와 CP 매입 규모를 8조원에서 16조원으로 2배로 늘린다. 증권사 등 금융회사가 발행한 CP도 매입 대상에 포함한다. 한국증권금융 재원을 통해 일시적으로 유동성이 부족한 증권사에 3조원 규모의 유동성 지원도 한다.

강원도의 지급 보증 거부 사태 등의 재발 방지도 약속했다. 추 부총리는 “지방자치단체(지자체) 보증 ABCP에 대해서는 모든 지자체가 지급보증 의무를 성실히 이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회사채와 단기자금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만큼 자금 경색 불안 완화에 충분한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며 “향후 유동성 위기와 함께 회사의 부도 가능성 등 신용위기가 함께 올 경우를 대비해 추가 대책도 미리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이날 50조원 넘는 자금을 채권시장에 공급하기로 한 건 '돈맥경화'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3년 물 기준으로 국채와 회사채(AA-)의 금리차(스프레드)가 지난 21일 1.3%포인트까지 벌어졌다. 세계금융위기이던 2009년 9월 이후 최고 수준을 나타나고 있다.

투자심리가 얼어붙으며 한국전력이 발행하는 한전채(AAA)도 미매각이 발생할 정도다. 단기자금 시장에서는 자금경색이 심해지고 있다. CP 금리(A1등급·91일물)는 지난 21일 연 4.25%로 전날보다 0.15%포인트 뛰었다. CP금리가 4%를 넘어선 건 2009년 1월 28일(연 4.09%) 이후 처음이다.

건설사의 경우 PF와 관련된 기업어음 차환이 어려워지며 ‘흑자도산’ 우려마저 나온다. 나이스신용평가에 따르면 올해 말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증권사와 건설사가 보증을 선 PF ABCP와 PF 자산유동화전자단기사채(ABSTB) 규모는 32조3908억원이다. 시장에서 소화되지 않으면 보증을 선 건설사와 증권사 등이 이를 떠안아야 한다. 일시적으로 유동성에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다.

'유동성의 블랙홀'이 된 은행으로의 자금 유입에도 제동이 걸렸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20일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 규제 정상화를 6개월 유예하기로 했다. LCR 비율을 맞추기 위해 은행채 발행 등이 늘어나는 걸 막기 위해서다. 최고 신용등급(AAA)인 은행이 채권 발행을 늘리며, 신용도가 낮은 회사채가 외면받는 ‘구축(驅逐) 효과’가 발생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LCR 규제도 필요하면 더 조정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금융위는 금융업권과 자금시장 관련 점검 회의를 열고 “금융업권과 기관투자자 등 금융시장 참가자가 금융시장의 자금중개기능을 복원해 선순환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며 밝혔다. 금융위 관계자는 “은행이나 대형 증권사 등 여력이 충분한 곳에서 자금경색을 겪는 분야에 자금을 공급해줘야 한다”고 했다.

한은도 오는 27일 금융통화위원회를 열어 적격담보대상에 은행채를 포함하는 방안을 논의·의결하기로 했다. 현재 한은은 시중은행에서 국채와 통화안정증권, 정부보증채만 담보로 받아 대출을 내주고 있다. 은행채로 범위를 넓히면 은행이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할 압력이 줄어들게 된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50조원+α’의 유동성 공급 조치로 일단 채권시장으로 불이 옮겨붙는 걸 막기는 했지만 미봉책일 뿐이다. '돈맥경화'를 야기한 원인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번 채권 시장 위기가 시장 실패가 아닌 정부발 실패라는 데 문제가 있다. 공동락 대신증권 연구원은 “지자체가 보증한 채권도 신뢰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등 투자심리가 급격하게 냉각됐다”고 설명했다.

정부에 막혀 전기요금을 제 때 인상하지 못한 한국전력이 채권을 찍어내 자금조달하는 것도 채권시장을 뒤흔드는 요인이다. 한전채 금리는 지난 14일 연 5.45%로 회사채(AA-) 금리(연 5.35%)보다 오히려 높다. 금융권 관계자는 “한전채가 쏟아지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일반 회사채 등이 겪는 유동성 문제가 쉽사리 해결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리 상승기 약한 고리인 부동산 PF 대출 급증은 그야말로 화약고다. 특히 상대적으로 규제가 약한 비은행권에서 PF 관련 투자가 급증하며 폭발력은 더 커졌다. 한은에 따르면 은행의 PF 대출 잔액은 2013년 말 21조5000억원에서 지난 6월 말 28조3000억원으로 늘어나는 데 그쳤다.

반면 보험·저축은행·증권사 등의 대출 잔액은 13조8000억원에서 84조원으로 급증했다. 특히 ABCP 등 PF유동화 증권 중 증권사가 채무 보증을 선 액수는 2013년 말 5조9000억원에서 지난 6월 말 기준 24조9000억원으로 4배로 뛰었다. 한은은 지난 9월 보고서에서 “PF유동화증권에 대한 증권사의 채무보증 확대로 PF대출 부실시 일부 증권사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부동산 관련 대출은 금리 상승기에 가장 취약한 부분인데 여기서 신뢰의 위기가 발생했다”며 “금리를 인상하더라도 유동성 위기로 흑자 도산을 하는 일 등은 막아준다는 명확한 신호를 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너무 빨리 카드를 꺼냈다는 목소리도 있다. 중소형 증권사들이 호황기 때는 고위험 투자를 하며 이익을 보다가 위기 상황이 오니 정부에 손을 벌린다는 지적이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아직 본격적인 위기도 아닌데 일부 금융사가 자금난을 겪는다는 지라시성 정보와 강원도의 무책임한 행보로 정부 입장에서 비상시 쓸 카드를 미리 꺼내게 돼 향후 정책 여력이 줄었다”고 말했다.

채권시장 안정을 위해 돈을 풀며 통화정책 엇박자 우려는 더 커졌다. 특히 한은이 기업유동성지원기구(SPV)나 금융안정특별대출 등을 통해 유동성을 공급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금융안정특별대출은 한은이 금융사로부터 우량 회사채(AA- 이상)을 담보로 받고 자금을 공급해주는 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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