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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한슬의 숫자읽기

변비약도 못 구하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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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박한슬 약사·작가

박한슬 약사·작가

변비약도 못 구하는 나라가 있다. 전쟁이 한창인 우크라이나 얘기도 아니고, 망국(亡國)의 상징이 된 베네수엘라 얘기도 아니다. 세계 10대 경제 강국을 자부하는 우리나라 얘기다. 국내 의료기관에서는 변비 환자에게 ‘마그밀정’이란 약물을 가장 흔히 처방한다. 영양제로도 복용하는 마그네슘이 주성분이라 부작용 우려가 거의 없고, 값도 매우 저렴한 편이다.

문제는 이런 중요한 약이 벌써 두 달째 품절 상태라는 점이다. 변비약만이 문제가 아니다. 급성 설사에 사용하는 대표적인 약물인 ‘로프민캡슐’도 품절 상태고, 멀미약, 여성 갱년기 호르몬 약물, 항불안제 등 품절 약품의 가짓수는 계속 늘어만 가고 있다. 오미크론 대유행부터 이어진 감기약과 ‘타이레놀’ 품귀 현상이야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지만, 수십 년간 꾸준히 사용해온 값싼 의약품들의 품절 현상은 이해가 어렵단 지적이 많다.

그런데 이런 약들이야말로 생산이 중단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이유가 있다. 건강보험공단과 보건복지부에서 정하는 국내 의약품 가격이 수십 년째 변동 없이 그대로 이거나 심지어는 더 낮아져서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변비약 마그밀정 약값을 살펴보자. 1999년에 처음으로 건강보험이 적용됐을 때 마그밀정의 가격은 1알당 18원이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현재도 마그밀정 1알은 18원이다. 설사약 로프민캡슐도 20년째 25원을 유지 중이고, 해열진통제 타이레놀은 1999년에 86원이던 1알당 가격이 현재는 1알당 51원으로 되려 40%가량 떨어졌다. 2000년 기준 7000원이던 영화 티켓 가격이 2022년에는 2배 올라 1만4000원이 됐는데, 약값은 쭉 제자리거나 되려 낮아진 것이다.

이런 가격구조에서 최근의 급격한 인플레이션으로 원자재 가격이 상승하자, 제약사들이 약 생산을 포기하게 된 게 지금의 의약품 품절 현상의 본질이다. 가뜩이나 망가진 베네수엘라 경제에 치명타를 날렸던 최고가격제(가격상한제)와 유사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부작용을 줄이겠다며 생산원가를 보전해주는 형태의 ‘퇴장방지의약품’ 제도가 운용되곤 있지만, 불합리한 약 가격 산정 시스템이 그대로이니 정부 보조가 이루어지는 약 성분의 수는 매년 늘 수밖에 없다. 고작 원가 보전 정도나 받고 극도의 저부가가치 생산을 지속해야 하는 제약사도 곤란하긴 마찬가지다.

의료는 산업이기 이전에 복지의 성격을 띤다. 그렇지만 최소한의 경제 원리조차 무시하는 식으론 복지조차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 더군다나 제약-바이오 부문을 미래 혁신 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거창한 계획이 1알에 18원짜리 약도 제때 공급되지 못하는 약가 책정 구조 아래에서 가능할까? 낡은 의료정책이 내는 파열음은 지금도 계속 커지는 중이다.

박한슬 약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