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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될지 모르는데 왜 야근? 20~30대 78% “월급만큼만 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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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호 02면

MZ세대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 바람

# 회사원 김우섭(34·가명)씨는 두 달여 전 사내 인사팀 면담을 통해 A부서에서 B부서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이 회사의 최고 인재만 모인다는, 고속 승진의 필수 코스라는 A부서에서 보낸 2년의 시간을 뒤로하고 한직(閑職)인 B부서로 향한 이유는 명확했다. 김씨는 “매일 (오후) 10시까지 야근은 기본이고 주말에도 출근하는 생활에 지쳐 인사이동을 먼저 요청했다”며 “회사에 애정이 없고 남들보다 빨리 승진하려는 야망도 없는데 타부서에 비해 월급을 많이 받는 것도 아니고 고생만 한다는 회의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현재 부서에 100% 만족한다는 김씨는 평일 오후 6시면 ‘칼퇴근’하고 주말마다 골프 등의 여가생활을 즐기고 있다.

# 올해 초 부서장으로 승진한 배형섭(48·가명)씨는 격세지감인 조직문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배씨는 “부서 단합을 위해 당일치기 야유회를 제안했는데 부서원 14명 중에 가겠다는 사람이 나를 포함해 3명뿐이었다”며 “무안해서 없던 일로 하려다가 그게 더 이상하게 보일까봐 지난 토요일에 3명이서 조용히 다녀왔다”고 설명했다. 배씨는 “20대와 30대 직원이 대부분인 부서에서 주말의 야유회가 달갑지 않을 줄은 알았고, 참가를 강요하려는 마음도 없었다”면서도 “내가 그 연령대였을 땐 의무감을 갖고 그런 행사에 열심히 참가하는 걸 당연시했는데 격세지감”이라고 토로했다.

기업 85% “MZ세대 동기 부여 어렵다”

해외에선 지난 7월 ‘zkchillin’이라는 이름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 틱톡 사용자를 통해 조용한 사직이 인기 신조어로 자리 잡았다. [사진 틱톡 캡처]

해외에선 지난 7월 ‘zkchillin’이라는 이름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 틱톡 사용자를 통해 조용한 사직이 인기 신조어로 자리 잡았다. [사진 틱톡 캡처]

회사가 빠른 승진 등의 보상을 약속하며 요구하는 고강도 근무엔 관심이 없다. 사내 단합 같은 얘기도 공허하게 들린다. 언젠가 직장을 옮기거나 관두면 끊어질 인간관계에 필요 이상 들이는 노력이 아깝다. 오직 내 워라밸(work-life balance·일과 삶의 균형)이 중요하고, 이를 위해선 회사나 직속 상사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 그렇다고 당장 사표를 내는 것도 아니다. 이처럼 단지 월급 받는 만큼만 일하면서 조용히 회사를 다닌다는 의미의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이 직장인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다. 특히 198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까지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 이른바 MZ세대의 호응이 거세다.

구인·구직 플랫폼 사람인은 직장인 329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70%의 직장인이 ‘월급 받는 만큼만 일하면 된다’고 응답해 ‘월급 이상 일해야 한다’고 답한 30%를 압도했다. 월급 받는 만큼만 일하면 된다고 응답한 비율이 20대가 78.5%, 30대가 77.1%로 40대(59.2%)와 50대(40.2%)를 크게 앞섰다. 20·30대 남녀 2708명은 가장 입사하기 싫은 기업으로도 ‘야근과 주말 출근 등 초과근무가 많은 기업’(31.5%) ‘업무량에 비해 연봉이 낮은 기업’(23.5%)을 꼽았다. 이러다보니 기업들의 속내도 복잡하다. 사람인이 기업 403곳을 상대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85.1%는 ‘MZ세대 직원들에 대한 동기 부여가 어렵다’고 응답했다.

기업들은 그 이유로 ‘장기근속 의지가 부족하고 애사심이 약함’(71.7%)을 가장 많이 꼽았다. 이어 ‘이전 세대보다 원하는 보상 수준이 높음’(47.8%) ‘일정 수준 성취만 달성하고자 함’(40.5%) ‘수직적 조직문화를 못 견딤’(34.1%) ‘협동심과 배려 등이 약함’(28.6%) 순이었다. 한 기업의 인사담당자는 “최근 당근마켓에 삼성전자 입사 기념품 판매 글이 올라와 논란이 되지 않았느냐”며 “MZ세대의 애사심이 어느 정도인지가 단적으로 나타난 사례”라고 평했다. 많은 기업이 매년 신입사원에게 따로 선물하는 다이어리 등 기념품은 기성세대한테는 자긍심을 주는 상징적 의미를 지녔다. MZ세대한테는 그게 통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MZ세대의 애사심은 왜 기성세대보다 약한 걸까. 프리랜서 이승훈(37)씨는 “과거 고도의 경제 성장기와는 달리 고용 불안이 이어지면서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요약한다. 그는 특히 “당장 내 아버지 세대만 해도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대량 실직을 겪었는데 그걸 눈앞에서 본 게 우리 세대”라고 말했다. 이씨는 “나를 언제 해고할지 모를 직장에 몸과 마음을 바치느니 이직이나 부업 등을 위한 자기계발에 힘쓰는 게 낫다는 생각이 내 또래 사이에선 강하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MZ세대 사이엔 ‘본캐’(원래의 캐릭터)와 ‘부캐’(또 다른 캐릭터)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본업은 조용히 유지하면서 부업에 신경 쓰는 경우가 급증했다.

그래픽=김이랑 kim.yirang@joins.com

그래픽=김이랑 kim.yirang@joins.com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5월 기준 29세 이하 취업자 중 부업을 가진 숫자는 63만명으로 6년 전인 2016년 5월(44만5000명)보다 41.5%(18만5000명) 증가했다. 긱워커(단기 노동자) 플랫폼 뉴워커의 직장인 881명 대상 설문조사에서도 41.4%가 부업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고, 57.9%는 부업을 찾을 의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법인보험대리점 리치앤코와 리서치 플랫폼 오픈서베이에 따르면 MZ세대의 주요 부업은 직장에 다니면서 틈틈이 할 수 있는 유튜버 등의 소셜 크리에이터(20%)나 배달 라이더(17%) 등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사회적 언택트(비대면) 전환에 재택근무와 관련 산업 수요가 늘면서 이런 부업도 한층 주목받은 분위기다.

사회적으로 장려하는 가치관에 매몰되기보다 개인이 선호하는 가치 추구에 집중하고, 합리성을 중시하는 MZ세대 특유의 성향도 반영되고 있다. 조수아(26·가명)씨는 “매일 야근과 주말 출근을 마다하지 않고 수십 년간 헌신해 사장이 됐다는 ‘샐러리맨 신화’를 들으면 존경심보다 동정심이 먼저 든다”며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직장 동료가 아닌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얼마나 가졌을까 싶다”고 말했다. 조씨는 “낮은 확률을 뚫고 임원이 되기 위해 그렇게 애쓰느니 가족과 보내는 시간과 여가생활에 집중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MZ세대가 강렬하게 경험한 자산시장 버블도 이들의 애사심이나 고강도 근무 가 아닌 조용한 사직을 부추기고 있다. 미국 증시 등에 투자 중인 서상영(28·가명)씨는 “직장은 (재테크를 위한) 신용대출 한도 유지를 위해 다닐 뿐”이라며 “2020년과 지난해의 대상승장에서 레버리지 효과를 잘 이용하는 게 투자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걸 배웠기 때문에 앞으로도 직장을 관두거나, 그렇다고 빡세게 다닐 생각은 없고 조용히 월급 받는 만큼 일하며 다닐 계획”이라고 전했다. 서씨는 “요즘 자산시장이 침체됐지만 역사적으로 늘 그랬듯 몇 년 버티면 다시 상승장이 올 거라 믿는다”고 덧붙였다.

“확률 낮은 임원 꿈 대신 가족과 함께”

이 같은 이유들에서 비롯된 조용한 사직은 국내에서만 유행 중인 게 아니다. 미국에선 지난달 CNBC 등의 유력 매체가 조용한 사직을 ‘대퇴사(the Great Resignation) 시대의 다음 단계(the next phase)’라고 칭하면서 집중 보도할 만큼 중차대한 문제로 보고 있다. 팬데믹이 불러온 자산시장 버블 등으로 자발적 퇴사자가 급증한 게 올해 3월까지의 일이었다면, 기록적인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행진과 자산시장 위축으로 직장의 중요성이 다시 커진 최근 들어선 퇴사자가 줄었지만 그렇다고 기성세대처럼 일에 모든 열정을 바치려 하진 않는 기조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구인 플랫폼 레주메빌더의 근로자 1000명 대상 설문조사에서도 21%는 최소한의 일만 하고, 5%는 급여 수준보다 일을 적게 하는 등 26%가 조용한 사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과 비슷하게 미국도 25~34세(25%)와 35~44세(23%)의 조용한 사직 비율이 45~54세(16%), 55세 이상(8%)보다 높았다. 이는 기업들의 생산성 저하를 유발한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미국 노동부에 따르면 올해 미국의 비농업 부문 노동생산성은 이전 분기 대비 1분기에 7.4%, 2분기에 4.6% 각각 감소(연율 기준)하면서 1947년 3분기 이후 74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2020년 기준 시간당 노동생산성이 미국(73.4달러)의 57% 수준인 41.8달러에 불과한 한국도 생산성 저하 우려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 때문에 근로자들의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장기근속의 의지 없이 퇴사부터 생각하는 직원의 생산 효율이 좋을 리가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박홍윤 한국교통대 행정학부 명예교수는 “많은 기업에서 요구하는 주인의식이 구성원의 노력을 더 많이 착취하기 위한 논리로 이해될 수 있고, 성실히 일하는 사람에게 정당한 대가를 주지 않는다면 그렇게 해석하는 게 타당할지 모른다”면서도 “주인의식은 기업뿐 아니라 모든 순간 개인의 발전과 성공을 이끄는 원동력이라는 걸 구성원들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용한 사직의 유행을 생산성 저하의 근본 요인으로 보긴 어려우며, 직장인들의 동기 부여를 위한 합리적 보상과 임금 격차 해소 등 구조적인 문제 개선이 선행돼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중소기업 임금 수준은 대기업 임금 대비 61.7%에 불과했다. 그나마 대기업에 다니면 상황이 낫지만, 전체 기업 종사자의 83%가량을 차지하는 중소기업 종사자들은 그만큼 애사심이 생기기 힘든 열악한 근무환경에 시달리고 있다는 얘기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최근 보고서에서 “한국의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생산성 격차가 노동시장 불균형과 결혼·출산 지연 등의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핵심 배경”이라며 “임금 격차가 커서 유능한 인재가 중소기업을 기피해 생산성이 저하되는 악순환이 발생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조용한 사직으로 향한 국내 MZ세대가 내는 목소리도 비슷하다. 이들은 일부 대기업을 제외한 대다수 기업이 고강도 근무와 애사심을 요구하는 데 비해 월급이나 복리후생 등 보상은 부실하게 제공하며, 그마저도 빠른 승진 같은 ‘기약할 수 없는’ 것들로 때우려 한다고 보고 있다. 노동에 대한 제대로 된 보상이 없을수록 직장에 대한 주인의식을 갖기 어려우니 생산성 저하도 필연적이라는 목소리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젊은 세대의 근무 태도를 비판할 게 아니라 이들이 조직 내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걸 느끼도록 (기업들이)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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