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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새동안 동해 뜬 러시아 요트 5척…탈출러시 '중간 기착지' 되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최근 러시아 요트 5척이 잇따라 국내 입국을 시도하자 출입국관리 당국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부분 동원령’ 여파로 시작된 탈(脫)러시아 행렬의 일부일 수 있기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WP) 등 외신에 따르면 지난달 21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전체 예비군 2500만 명 중 30만 명을 징집하겠다는 부분 동원령을 내리자 러시아에선 전세기와 요트를 동원한 탈출 러시가 시작됐다.

엿새간 동해 뜬 러시아 요트 5척

지난 4일 포항 신항에 입항한 러시아 요트 B호. 사진 안호영의원실

지난 4일 포항 신항에 입항한 러시아 요트 B호. 사진 안호영의원실

 13일 법무부와 해양경찰 등에 따르면 지난 2일 러시아 남성 4명이 타고 있는 16t급 요트 A호가 경북 포항 해역에 나타났다. A호는 해경과 교신한 뒤 경북 포항시 동빈 마리나에 입항했다. 지난 2월 제14차 국제테러대책위원회에서 의결된 ‘마리나항 출입국관리 강화 방안’에 따라 지난 6월부터 요트를 이용해 입국하려면 동빈, 속초 등 전국 10개소 거점 마리나항을 이용해야 한다. 이틀 뒤엔 러시아 남성 4명이 탄 3.8t급 요트 B호도 포항 신항에 접안했다.

 입항 행렬은 멈추지 않았다. 5일엔 러시아 남성 9명과 여성 1명 탄 17t급 요트 C호가 포항에, 같은 날 러시아 남성 5명이 탄 6t급 요트 D호가 울릉도 사동항에 닻을 내렸다. 7일쯤엔 러시아 남성 3명이 탄 15t급 요트 E호가 부산 해경이 관할하는 해역으로 접어들었다가 이탈하기도 했다. 대부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항한 선박이었다고 한다.

 출입국관리법에 따라 외국인이 한국에 입국하려면 유효한 여권과 법무부 장관이 발급한 사증(査證)이 있어야 한다. 러시아는 한국과 사증 면제협정을 체결한 국가라 사증 대신 K-ETA(한국 전자여행 허가)를 신청해 한국 출입국 당국의 승인을 받으면 된다.

지난 5일 울릉도에 입항한 러시아요트 D호 사진 안호영의원실

지난 5일 울릉도에 입항한 러시아요트 D호 사진 안호영의원실

 그러나 요트 승객 중 K-ETA를 신청해 승인받은 건 A호 승선객 2명뿐이었다고 한다. 출입국관리법 12조에 따라 출입국관리소는 입국 심사 시 ▶여권과 사증이 유효한지 ▶입국목적이 체류자격에 맞는지 ▶입국의 금지 또는 거부의 대상이 아닌지 등을 조사한다. 출입국 관리 당국은 A호 승객 2명을 뺀 21명에 대해 입국을 불허했다. 입국목적이 불분명하고 관련 서류가 미비하다는 이유였다. “관광하기 위해서 왔다”는 러시아인들의 방문목적을 믿을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입국을 허가받은 러시아인 2명은 한국 방문 이력이 있거나 한국에 가족이 체류중인 경우인데다 50대 후반이라 동원령 대상이 아니라는 점 등이 고려된 경우다. 러시아 정부는 병사·부사관으로 전역한 35세 미만 예비군과 초급 장교로 전역한 50세 이하 예비군, 고급 장교로 전역한 55세 이하 예비군을 우선 동원 대상자로 명시했다.

지난 5일 포항에 입항했다가 11일 출항 한 러시아 요트 C호.사진 안호영의원실

지난 5일 포항에 입항했다가 11일 출항 한 러시아 요트 C호.사진 안호영의원실

 입국이 불허된 러시아인들은 ‘긴급피난’을 신청한 뒤 포항신항과 울릉 사동항 선석에 머무르고 있다. 긴급피난 선박 관리규칙은 연료, 청수 또는 식료품 등이 불의의 사태로 결핍돼 안전에 지장이 있는 경우 등에 한해 외국 선적이 개항장이 아닌 장소에 피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11일 C호와 D호가 한국을 떠나면서 포항엔 A호와 B호만 남았다. 입국 허가를 받은 A호 승객 2명은 동행 2명이 입국 불허 통보를 받으면서 이번 달 17일 태국으로 떠나겠단 의사를 출입국관리 당국에 전했다고 한다. B호도 요트 수리를 마치는 대로 태국으로 떠날 예정이다.

 출입국 관리 당국은 만일에 대비해 상황을 주시한다는 방침이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12일 법무부 확대간부회의에서 “최근 요트를 이용해 입국하려는 외국인들과 관련해 유효 비자를 소지하지 않거나, K-ETA를 받지 않은 경우 입국을 허가하지 않은 바 있다”며 “통상의 출입국시스템에 따른 조치이고, 앞으로도 원칙대로 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 소속 안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러시아 탈출이 급증할 경우 한국이 사실상 중간 기착지가 될 가능성이 큰 만큼 구체적인 대응 매뉴얼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부분 동원령 피해 탈출, 난민 될 수 있을까 

 일각에서는 러시아인들이 부분 동원령을 피해 한국으로 입국할 경우 난민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난민인권네트워크는 12일 성명을 통해 “정부는 난민협약 제31조에 따라 부분 동원령을 피해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오는 이들이 강제송환되지 않도록 난민 절차로의 접근을 명확히 해야 한다”며 “한국에 체류 중인 러시아인이 징집 연령대에 포함된다는 이유로 러시아로의 송환을 거부하고 한국 정부에 비호를 신청할 경우에 대비해 체류·심사에 관한 지침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연주 난민인권센터 변호사는 “병역기피는 전쟁을 개인의 차원에서 반대하는 방법 중 하나다”며 “병역기피자라 해도 ‘정치적 의견’을 가진 피난으로 간주하는 객관적 정황이 있을 경우에 난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난민소송 경험이 많은 한 변호사는 “난민 신청을 명시적으로 하지 않았더라도 난민에게 통역 등을 제공하지 않고 난민신청 관련해 알리지 않은 건 유럽 인권협약 위반이라고 판단한 유럽 판례도 있었다”며 “부분 동원령을 피해 한국에 온 이들도 난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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