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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에버라드 칼럼

북한 군복무 1년만 줄여도 주민 삶 좋아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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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식량난에도 미사일 최대치 도발

백신 지원 수용 등 변화 나서야    

12월 인도 안보리 좌장 때 기회

지난달 세계식량기구(WFP)는 올겨울 북한의 농작물 수확이 가뭄 등으로 더 나빠질 것으로 전망했다. 북한 정권이 코로나 확진자 수 보고를 중단해 실제 상황은 드러나지 않지만, 상황이 악화일로임은 불문가지다.

식량난에도 미사일 최대치 도발 #백신 지원 수용 등 변화 나서야 #12월 인도 안보리 좌장 때 기회

2020년 9월 북한 양강도 혜산시 장마당 모습. 북한내 코로나가 확산되기 전이다. [교도=연합뉴스]

2020년 9월 북한 양강도 혜산시 장마당 모습. 북한내 코로나가 확산되기 전이다. [교도=연합뉴스]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북한은 제재에 더해 국제금융시스템과도 단절돼 있다. 신용도가 깎이는 위험을 무릅쓰고 북한과 거래하려는 국제 은행은 없다. 그런데도 북한은 올해 들어 역대 가장 많은 미사일을 발사했다. 미사일이 주권을 지킨다고 주장하지만, 미사일로 주민을 먹여 살릴 수도, 코로나를 멈출 수도, 우방을 만들 수도 없다.
 문제 해결 방안으론 번지수가 틀려도 한참 틀렸다.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고, 기본적 자유와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고, 주민에게 다양한 매체를 접할 자유를 주고, 강제수용소를 해체하고, 한국의 형제들과 통일 논의를 시작하는 게 최선이지만, 이는 현실과는 먼 얘기다. 북한은 통일을 정권의 자살행위라 여긴다. 김정은 정권 외 대안이 있다고 생각할 자유를 주민에게 줄 리도 없다. 하지만 북한 정권이 용기를 내서 다음 네 가지 방안을 받아들이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어도 상황을 완화할 수는 있다. 이 중 하나만 실행해도 정권 입지가 강해지고 주민 삶도 개선될 것이다.
 먼저 중국 등 외부의 코로나 백신 지원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분량은 부족해도 북한 정권에 매우 중요한 평양 엘리트 집단의 면역은 가능하다. 대대적으로 선전한 '코로나 종식'을 뒤집지 않고도 재확산 방지 차원이라고 하면 된다. 최근 한 지인은 북한 관리로부터 백신 지원을 받는 걸 고려 중이라는 말을 들었다는데, 그러길 기대한다.
 둘째, 식량·연료 등 수입 결제에 필요한 외화 확보를 위해 교역을 재개해야 한다. 코로나 유입 문제는 차량 점검 등 방역으로 해결할 수 있다. 2006년 1차 핵실험 이래 지속한 유엔안보리 제재 전부는 아니어도 최근 적용된, 경제의 숨통을 죄는 일부 제재라도 해제해야 가능하다.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은 북한이 영변 핵시설 폐쇄와 전체 제재를 바꾸자고 주장해 파국을 맞았다. 미국 외교관들은 필자에게 당시 미국이 일부 제재 해제 방안을 준비했었다고 밝혔다. 사실 대북 제재는 미국의 독자 제재보다 안보리 제재가 중심이다. 안보리 의장국과 직접 협상할 수도 있다. 오는 12월 유엔 안보리 의장국은 인도로 바뀌고, 내년 4월엔 러시아가 맡는다. 북한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나라들이다.
 제재가 부분 해제되면 북한이 간절히 원하는 투자 유치도 가능하다. 2000년대 초반 대북 투자에 나선 기업들은 투자금을 뺏기고 파산했다. 북한 당국은 중국 자금엔 감히 손을 못 댔다. 중국 섬유기업은 수익을 냈다. 강력한 투자 보호책을 담은 법을 만들고 북한이 안전한 투자처라는 확신을 준다면 과거 운영했던 경제특구도 북한 발전의 주력으로 부활할 것이다.
 셋째는 청년들의 군 복무 기한 단축이다. 1993년 이후 공식적인 군 복무 기간은 10년이다. 1년만 줄여도 효과는 엄청나다. 젊은 노동력을 민간 부문으로 돌리면 북한 사회 전체가 환영하고 군으로 갈 곡물 양이 줄면 농민들은 남은 작물을 팔 수 있다. 이게 동기 부여가 돼 작황은 더 좋아진다. 북한 정권이 민심을 얻는 길이다.
 넷째, 형사법 체계 일부 개혁이다. 주민에 대한 공포정치는 정권 유지에 필수여서 정치범 수용소 폐쇄까진 못하겠지만 20만 명으로 추산되는 수감자를 줄일 수는 있다. 가족까지 가두는 관행을 없애면 된다. 한 탈북자는 필자에게 가족까지 수감하는 게 비용만 많이 들고 비효율적이란 이유로 이를 바꿔야 한다는 내부 논의가 있었다고 전했다. 강제노동을 통한 수용소 수입이 정치범 가족들이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일할 때 내는 경제성과 비교가 되겠는가. 더욱이 북한 정권이 국내와 국제사회로부터 박수받을 일이다.
 대책 없이 낙관적인 제안일까. 김여정의 최근 섬뜩한 발언을 볼 때 북한 지도부가 이런 변화를 수용할 준비가 된 것 같지 않다. 그러나 2017~2018년, 대치에서 대화로 급변한 과거를 보면 위 제안보다 더 급진적 변화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희망의 샘은 마르지 않는다고 하지 않나.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