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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염재호 칼럼

기술패권 시대의 국가전략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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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기술패권을 둘러싼 미·중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전통적 제조업에서 중국이 세계 생산기지가 되는 것은 참아주었지만 첨단산업만큼은 결단코 양보할 수 없다는 미국이다. 최근 중국계 미국대학 교수들이 기술유출 스파이 혐의로 구속되고 중국 유학생들에 대한 미국대학들의 우호적 태도도 사라지고 있다. 중국에 첨단기술과 제품이 유출되지 않게 우방국도 철저히 단속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술패권을 향한 미국의 전략은 마치 “일본이 세계최고(Japan as No.1)”라며 승승장구하던 신흥세력 일본을 1985년 플라자 합의를 통해 단번에 기세를 꺾었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물론 당시 일본과 지금 중국 상황은 전혀 다르고 그 효과도 동일할 것이라고 예견할 수는 없지만 미국에 도전하는 세력에 대해 사다리 걷어차기 전략임에는 틀림없다. 당시 일본 엔화를 일거에 두 배로 평가절상시켜 지난 30년간 일본을 장기침체의 늪에 빠지게 한 미국의 전략은 유효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일본의 빈자리를 파고들어 비약적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미·중 기술패권 경쟁의 위기 심화
안보나 이념 넘어선 외교전략 필요
첨단기술 에코시스템과 인력 절실
혁명적 미래 국가전략 마련해야

하지만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미·중 기술패권 경쟁은 기회라기보다는 심각한 위기이다. 미·중 패권경쟁에서 우리만 새우등 터지는 형국이다. 최근 미국의 인플레이션방지법(IRA) 통과로 우리는 쉽게 유탄을 맞았다. 한국의 반도체 칩4 동맹 가입에도 중국의 견제가 만만치 않았다, 미군의 사드 배치에 대한 경제보복 전례만 보더라도 미·중 기술패권 경쟁에 대한 우리의 국가전략은 더욱 치밀하게 수립되어야만 한다.

강대국 사이에 낀 약소국은 딜레마 상황에서 어느 편을 들어도 안 된다. 좌파 정부가 중국 편을 들고 우파 정부가 미국 편에 서는 것도 위험하다. 안보나 이념의 관점에서 일방적 외교는 다른 한 쪽의 공격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중세유럽의 베네치아가 동서 로마제국의 갈등 사이에 오로지 상업적 이익만을 내세우고 정치적 편향성을 철저히 배제한 전략을 취했던 역사는 곱씹어 볼만한다. 셰익스피어가 ‘베니스의 상인’이라는 희곡을 통해 베니스를 장사꾼의 도시로 각인시킨 것처럼 당시 도시국가를 지키기 위한 베니스의 전략은 오로지 경제이익 우선이었다, 따라서 이제는 국가정체성 담론을 넘어 치밀하고 영리한 외교전략이 더욱 절실해진다.

초격차 첨단기술 확보를 위한 국가전략도 마련되어야 한다. 최근 요소수 사태나 일본의 소재, 부품, 장비 경제보복 사례를 교훈삼아 글로벌 밸류체인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산업기술 에코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 안보를 위해 국가정보원이 존재하듯 이제는 총합안보(total security)의 관점에서 국제적 산업정보를 통괄하는 국가기구의 설치가 절실하다. 희토류와 같은 소재, 최첨단 부품이나 장비, 에너지나 식량자원의 글로벌 체인이나 네트워크에 대해 마치 기상청의 태풍 예보시스템과 같은 총체적 정보시스템이 필요하다. 또한 AI시대를 맞아 국가 디지털 플랫폼을 구축하기 위해 다양한 빅 데이터를 관리하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부처의 신설이 기술패권 시대에 필수적이다.

거시적 에코 시스템뿐 아니라 인적자원 확보를 위한 정책설계도 고민해야 한다. 먼저 미국이 중국의 우수 첨단기술 인력을 견제하는 틈새를 우리의 인재들이 파고 들어야 한다. 그동안 중국 유학생들의 대거 진출로 우리 학생들이 미국 명문대학교 대학원에서 입학허가서 받기가 쉽지 않았다. 이제는 적극적인 유학 지원정책으로 첨단기술을 전공하는 많은 학생들이 우수 대학원에서 배우고 연구네트워크를 확보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실리콘밸리나 보스턴 등 미국의 최첨단 연구시설과 기업에 박사후 과정(post-doc) 파견지원. 기업의 기술연수 확대 등 다양한 첨단기술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한 전략이 필요하다.

싱가폴은 자체인력은 부족하지만 정부의 적극적인 외국 첨단기술 인력 확보 노력을 통해 국제적 기술강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싱가폴국립대학이나 난양공대에는 국가의 엄청난 지원정책으로 세계의 석학들이 몰려들고 있다. 정부의 연구지원체계인 A*STAR가 만든 바이오폴리스는 초기 십여 년간 50개 중 45개 프로젝트가 외국연구자들에 의해 운영되었고 이를 통해 존슨앤존슨과 같은 최첨단 바이오 연구시설도 유치했다.

우리의 주요대학 주변이 수도권정비계획법 규제로 기업의 연구시설이 들어오지 못하고 고시촌이나 유흥음식점들로만 즐비한 현상은 개탄할 만 하다. 초중고는 교육비가 남아돌아 적립금이 수조원이 넘는데 대학재정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30% 이상 낮은 현실을 타개하지 않으면 기술패권시대에 우리의 미래는 없다. 판교밸리 못지 않은 기술벤처타운이 대학가 주변에 연구기술특구로 즐비하게 설립되어 산학기술협력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술패권 경쟁시대에 우리는 곧 경제후진국으로 전락하고 미·중 갈등으로 인한 전쟁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다. 율곡의 십만양병설을 무시하고 다시 징비록을 쓰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는 미·중 기술패권시대에 혁명적인 국가전략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