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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더욱 교묘해진 중국의 한국사 왜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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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여호규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

여호규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

중국국가박물관의 ‘한국 고대사 연표 왜곡’ 사건이 최근 한국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지면서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다. 대한민국 국립중앙박물관에 따르면 그동안 한·중·일 3국은 상호 교류와 협력을 목적으로 2년마다 공동 전시회를 개최해왔다. 올해는 한·중 수교 30주년과 중·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아 중국국가박물관이 지난 7월 26일 ‘동방의 상서로운 금속(東方吉金): 한·중·일 고대 청동기전’을 개막했다.

이에 국립중앙박물관은 유물과 함께 고구려와 발해가 포함된 연표〈표 오른쪽〉를 제공했는데, 중국은 이 부분을 임의로 삭제한 한국 고대사 연표〈왼쪽〉를 전시했다. 상대국이 제공한 자료를 중국 측이 제멋대로 수정했다는 점에서 이는 명백한 국제 규범 위반이다. 다만 국립중앙박물관도 사건을 예방하지 못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중국의 역사 왜곡 행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아무리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라 하더라도 국립중앙박물관은 주중 대사관 등을 통해 치밀하게 현장을 미리 점검했어야 했다. 중국이 국제 규범을 지키리라 믿었던 것 같은데, 중국은 국제적 신의를 저버리고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의도에 따라 이번 일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전시한 한국사 연대표(왼쪽)에 고구려와 발해가 빠져 있다. 고조선의 건국시기도 표기하지 않았다. 반면 국립중앙박물관(오른쪽)이 제공한 연대표에는 고조선,고구려,발해 건국시기가 모두 포함돼 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중국이 전시한 한국사 연대표(왼쪽)에 고구려와 발해가 빠져 있다. 고조선의 건국시기도 표기하지 않았다. 반면 국립중앙박물관(오른쪽)이 제공한 연대표에는 고조선,고구려,발해 건국시기가 모두 포함돼 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중국, 고구려·발해 연표 삭제 도발
외교부·교육부, 체계적 대응 필요
국립고구려박물관 신설 추진해야

이번 사건을 접하며 중국이 2002~ 2007년 추진한 ‘동북공정’을 떠올린 이들이 많을 것이다. 동북공정의 이론적 토대는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이다. 중국은 1949년 10월 정부 수립과 함께 많은 소수 민족을 편입했다. 중원 왕조만 중국사로 설정하는 종전의 화이론(華夷論)에 따른다면 수많은 소수 민족의 역사를 독립 역사로 다뤄야 했다. 이 때문에 중국은 현재의 중국 영토를 기준으로 중국사의 범주를 설정하는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을 고안한 뒤 무수한 소수 민족의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했다.

다만 중국은 1980년대까지는 북·중 관계를 고려해 고구려사를 조선사(한국사)로 인정했다. 그런데 1990년대 북한이 체제 위기로 내몰리자 고구려사에도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을 적용해 중국사로 편입하는 동북공정을 추진했다. 이때 중국은 정부의 지원 아래 고구려사 관련 연구소를 대거 설치하고 전문가를 양성해 연구 기반을 다졌다. 중국이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을 포기하지 않는 한 고구려사 왜곡을 그만둘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한국 상황은 어떠한가. 2003년 동북공정이 알려지며 중국의 역사 왜곡이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르자, 교육부는 2004년 초 고구려연구재단(2006년 현 동북아역사재단으로 통합)을 설립하며 대응했다. 그해 8월 한·중 양국 외교부는 5개 항으로 된 구두 합의를 발표했다. 그런데 한·중 외교 마찰이 잠잠해지자 사회적 관심이 줄어들었고, 정부 지원도 대폭 축소됐다.

고구려연구재단에서 예닐곱을 헤아리던 고구려 전공자가 지금 동북아역사재단에는 2명만 남았다고 한다. 지난 10년간 재단 예산은 30%가량 삭감됐다니 연구원이 퇴직해도 충원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한국 측의 대응 역량이 이 정도라면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는 중국의 역사 도발에 속수무책으로 또 당할 것이다. 정부 여당이든 거대 야당이든 정기국회에서 재단 예산을 원상 복구하고, 재단은 연구 인력을 충원해 대응 역량을 충분히 갖춰야 할 것이다.

차제에 국립중앙박물관과 문화재청은 국립고구려박물관을 건립하기를 제안한다. 아차산 일대나 임진강 유역의 고구려 유적을 잘 활용하면 야외 전시관까지 갖춘 번듯한 박물관을 건립할 수 있을 것이다. 정보기술(IT)을 활용하면 북한과 중국의 고구려 유적도 디지털 영상으로 전시할 수 있다. 국립고구려박물관은 세계를 향해 고구려사가 한국사임을 당당하게 알리는 발신처가 될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과 외교부·교육부는 중국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학계·언론계와 협력해 유기적 대응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번 사건도 국립중앙박물관과 외교부가 긴밀하게 협조했다면 예방했을 것이다. 중국 측에는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답게 행동하라고 엄중히 촉구해야 한다. 시진핑 총서기의 말을 인용해 이번 전시회 개막사에 실린 ‘평등과 호혜의 외교 자세’를 중국이 제대로 지키면 된다. 그 출발점은 상대국의 역사를 존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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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규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