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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흑인 인어공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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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전영선 기자 중앙일보 팀장
전영선 K엔터팀 팀장

전영선 K엔터팀 팀장

‘디즈니한테 또 영업 당했네’. 디즈니가 지난 9일 공개한 ‘인어공주’ 실사 영화의 1분 24초짜리 예고편을 보고 든 생각이다. 디즈니는 이날 개막한 팬 축제 ‘D23 엑스포’에서 내년 5월 개봉할 영화의 한 조각을 보여주었다.

이 짧은 영상은 3년 전 흑인 가수 겸 배우 핼리 베일리가 주인공 에리얼 역에 캐스팅되자 터진 논란을 재점화하는 데 충분했다. 1989년 개봉한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의 에리얼은 빨간 머리에 푸른 눈, 흰 피부를 지니고 있다. 미국 언론은 흑인 에리얼이 등장한 예고편을 본 어린 흑인 소녀들이 “나와 같다”고 감동하는 순간을 공유하는 트렌드, ‘나의 에리얼이 아니다’라며 반대하는 현상을 전하고 있다. 관심이 뜨거운 만큼 디즈니 유튜브에 올라온 이 예고편은 공개 8일 만에 2000만 조회 수를 넘겼고, 댓글은 무려 21만개가 달렸다.

인어에 어떤 피부색이 적합한지 논쟁하는 것은 사실 기이한 현상이다. 국내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일명 ‘원작 수호론자’들은 마치 인어를 보기라도 한 듯, ‘빨간 머리의 백인이 아니다’라고 불평한다. 그러나 원작 파괴는 애초에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먼저 시작했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원작 동화(1837) 속에선 인어 공주는 이름도 없고 외모에 대한 묘사도 구체적이지 않다. 디즈니는 초록색 꼬리와 보색을 이루는 빨간색 머리를 택했지만, 그 이전 나온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선 인어는 대체로 금발로 묘사된다. 디즈니는 또 희생으로 완성되는 사랑을 강조한 원작의 결말 대신 완벽한 디즈니식 해피엔딩을 보여준다.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의 원작 변형은 두말할 것 없이 상업적 성공을 위한 선택이다. 이 덕에 ‘인어공주’는 80년대 디즈니의 암흑기를 종료시킨 흥행작 반열(전 세계에서 약 2억35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에 올랐다. 흑인 인어공주 캐스팅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디즈니는 짧은 예고편 하나로 이 낡은 이야기를 꼭 확인해야 직성이 풀릴 팬과 안티팬을 충분히 만들어냈다. 무엇보다 누가 ‘디즈니 공주’로 선택되는지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사회적 착시 생산에도 성공했다. 내년 창립 100주년을 맞는 세계적 콘텐트 기업의 내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