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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자이언트 스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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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조현숙 기자 중앙일보 기자
조현숙 경제정책팀 차장

조현숙 경제정책팀 차장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은 한 달에 두 번꼴로 ‘쉬운 우리말 쓰기’ 자료를 낸다. 이해하기 어려운 외국어를 알아듣기 쉬운 우리말로 바꿔 쓰자는 취지다. 지난달 3일 발표 자료에선 베이비 스텝, 빅 스텝, 자이언트 스텝을 바꿔야 할 말로 지목했다. 베이비 스텝은 소폭 조정, 빅 스텝은 대폭 조정, 자이언트 스텝은 광폭 조정으로 각각 고쳐 쓰자고 권했다.

베이비 스텝은 시장이 충격을 덜 받도록 중앙은행이 아기 발걸음(baby steps)처럼 한 번에 0.25%포인트씩만 조금씩 기준금리를 올리는 걸 뜻한다. 빅 스텝은 크다(big)란 수식어에 걸맞게 0.5%포인트 금리 인상을 의미한다. 모두 미국 현지에서 쓰는 말이다.

그런데 자이언트 스텝이 문제다. 0.75%포인트 인상을 뜻한다는데 정작 미국 현지 언론과 경제부처 발표에서 보기 어렵다. 콩글리시란 얘기다. 출처는 불분명하다. 올해 1~2월 증권사 리포트와 국내 언론에 가끔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년도 안 돼 당당히 온라인 경제용어사전에 오를 정도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국립국어원에서 바꾸자고 권고할 만큼 널리 쓰이는 단어가 됐다.

최근 등장한 울트라 스텝(1%포인트 인상)은 말할 것도 없다. 역시 콩글리시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나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같은 외환·통화 당국 수장이 빅 스텝이란 말은 써도 자이언트 스텝, 울트라 스텝이란 단어는 잘 언급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원이 불분명한 한국산 조어지만 작명은 잘한 편이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가 내디딘, 말 그대로 거인(giant)의 발걸음에 쑥대밭이 된 한국 외환시장을 보면 절묘하다. 오는 20~21일(현지시간) 미국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회의가 열린다. Fed는 또 한 차례 거인의 발걸음을 준비하고 있다. 0.75%포인트 금리를 또 올린다는데 6월과 7월에 이어 벌써 세 번째다. 0.25%포인트씩 아기 걸음마를 계속하고 있는 한은이 따라잡기엔 벅차도 너무 벅차다.

미국 현지에서도 안 쓰는 자이언트 스텝이란 단어가 한국에 널리 퍼진 건 금리 인상에 대한 관심과 공포가 그만큼 커서다. 거인에 맞서는 다윗의 지혜가 당국에 보이지 않아 더 불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