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에버라드 칼럼

'방역대전 승리' 선언한 김정은의 모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5면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경제·사회적 충격파에 봉쇄 해제

실상과 거리 먼 '코로나 박멸' 선전  

평양 확산 땐 정통성·충성심 흔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지난달 11일 ″김정은 동지께서 최대비상방역전의 승리를 선포하는 역사적인 총화회의에서 중요연설을 하시었다″며 김 위원장이 코로나19 위기의 완전 해소를 선언했다고 보도했다. [연합뉴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지난달 11일 ″김정은 동지께서 최대비상방역전의 승리를 선포하는 역사적인 총화회의에서 중요연설을 하시었다″며 김 위원장이 코로나19 위기의 완전 해소를 선언했다고 보도했다.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달 10일 전국 비상방역 총화회의에서 코로나 방역 대전 승리를 선포했다. 이후 북한의 방역 봉쇄는 해제되고 무역도 일부 재개됐다.

경제·사회적 충격파에 봉쇄 해제 #실상과 거리 먼 '코로나 박멸' 선전 #평양 확산 땐 정통성·충성심 흔들

북한의 방역 조치는 중국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백신 접종, 보건 상황 면에서 중국보다 열악한 북한이 코로나를 어떻게 ‘박멸’ 했을까. 실제는 김정은에게 좋은 소식을 올려야 한다는 초조감에 휩싸인 북한 당국자들이 코로나를 종식했다고 보고했고, 김정은은 아마도 그 보고가 거짓인 줄 알면서도 속아넘어가는 척했을 것이다.

왜일까. 먼저 방역 조치가 북한의 경제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무역과 주민 이동이 제한되고 노동자들이 격리되면서 공장 가동이 멈췄다. 또 코로나 확산으로 인한 두려움은 북한 사회 전체를 짓눌렀다. 전국 비상방역 총화회의에서 한 관리는 공포에 질린 주민들이 의약품을 구하려고 약국에 몰려들어 '무질서와 혼잡'이 조성되었다고 했다. 지난 5월 평양에선 가짜 의약품 판매상을 엄중히 처벌한다는 경고문이 붙었다. 사회 불안정을 우려한 북한 지도부는 코로나 확산 위험을 무릅쓰고 방역 해제에 나섰을 것이다. 김정은이 ‘방역 대전 승리’를 선포한 이상 코로나 재확산은 최고 지도자의 말을 뒤집는 게 된다. 재확산 상황을 보고하는 자에게 끔찍한 대가가 따른다는 걸 북한 관료들이 모를 리 없다. 북한 내 코로나 확산 실상은 더 파악하기 어렵게 됐다.

 두 번째 이유는 정통성과 충성심 약화에 대한 걱정이다. 북한 정권은 그동안 핵무기 프로그램 개발로 정통성을 지켜왔다. 하지만 내부 상황이 악화하며 요란한 핵실험을 통해 얻을 정치적 이득도 감소하고 있다. 어떤 이유에선지 준비를 마친 7차 핵실험도 하지 않고 있다. 최근 주민에게 경제적 번영을 약속하며 정통성을 찾으려 했지만, 경제도 곤두박질치고 있다. 정권에 대한 관료들의 충성심 약화는 국가 운영 역량 저하로 이어진다. 전국 비상방역 총화회의에서 나온 발언을 보면, 최고 지도자가 전면에 나섰음에도 간부들의 코로나 대응은 실패했다. 정권 전복 시도는 감지되지 않지만(6월 2주간, 7월 3주간 김정은의 두문불출은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어쨌든 충성심이 약화하면 정권이 위기에 처했을 때 간부들이 방관할 가능성이 높다. 정통성 부재는 주민 충성심 약화, 정권의 취약성으로 이어진다. 북한이 최근 잇단 회의에서 프로파간다(선전선동)에 더 힘을 쏟으라고 한 것은 역설적으로 그간의 프로파간다가 효과를 내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코로나 종식' 선언은 북한 정권의 이런 고민에 대한 해답으로 나왔을 수 있다. '영도력을 지닌 위대한 지도자' 덕에 다른 나라 국민처럼 고통을 안 받았다는 점을 북한 주민에게 확신시킨다면 정권의 위상은 크게 강화된다. 코로나 사망자도 계속 나오겠지만 집단 농장에서 사망하면 다른 원인으로 죽었다고 하면 된다. 하지만 코로나가 평양에서도 계속 확산하면(이동 제한이 별로 없는 평양에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의 엘리트들은 당국의 코로나 종식 선언이 거짓임을 알게 되고, 한국과 서방의 백신 및 치료제 지원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자신의 가족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평양의 엘리트 집단이 멀어진다는 건 정권으로선 심각한 문제다. 코로나 퇴치 선언을 통한 북한 정권의 정통성 회복 시도는 위험한 도박이자 필사적 몸부림이다.

방역 총화회의 등에서 나온 김여정 부부장의 거친 발언은 이런 결정을 하기까지 북한 지도부 내 분위기, 북한 당국의 속마음, 갖은 노력에도 코로나 방역에 실패한 북한 정권의 좌절감을 보여준다. 김여정은 한국이 전단을 살포해 코로나바이러스를 전파했다는 주장까지 했다.

정통성 추구는 북한 정권 생존의 핵심이다. 자칫 1980년대 동유럽 국가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 당시 그 나라들은 내부 기반이 취약했고 국내적 억압(정보기관에 의존)과 핵심 그룹(북한의 경우 ‘돈주’)과의 타협, 그리고 소련에 기대 연명했다. 소련 붕괴 후 이들의 붕괴 속도는 충격적일 정도로 빨랐다.

북한은 이미 그들처럼 붕괴 직전 상황에 처했을까. 아니면 곧 그렇게 될까. 어떤 이유에서든 중국이(덜 하겠지만 러시아도) 지지를 거둔다면 북한 정권은 무너질까. 북한 주민은 덤덤히 지켜볼까, 환호할까.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