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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진중권 칼럼

인공지능, 시대의 흐름인가 예술의 종언인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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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얼마 전 미국의 한 온라인 게임 제작자가 AI 프로그램 ‘미드저니’로 생성한 작품을 출품해 디지털 아트 부문에서 1등을 차지했다. 아니나 다를까. 해묵은 물음이 다시 제기됐다. 이 논란을 다룬 중앙일보 기사엔 이런 부제가 달려 있었다. ‘시대의 흐름인가, 예술의 종언인가.’

이 논란의 기원은 저 멀리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옥스퍼드에서 가르칠 때, 그의 강의를 듣는 학생 중에 유명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앨런 튜링.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컴퓨터는 기본적으로 그가 발명한 ‘유니버설 튜링 머신’에 속한다.

AI가 생성한 작품, 디지털 아트 1등
그래도 우승자는 그걸 고르는 인간
카메라 나오자 창조 영역 개척했듯
이번에도 AI 뛰어넘어 더 비약할 것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 튜링의 대답은 ‘예스’였다. 다만, 그는 ‘기계’나 ‘생각’이라는 낱말의 의미가 모호하다며, 이 물음을 명확히 정식화하기 위해 1950년의 논문에서 하나의 게임을 제안한다. 그것이 바로 ‘이미테이션 게임’, 우리에게 ‘튜링 테스트’로 알려진 그 게임이다.

그로부터 60여년 후 튜링 테스트를 통과한 기계들이 속속 등장했다. ‘유진 구스트만’(2014)은 대화 상대자인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우크라이나에 사는 13세의 소년으로 믿게 만들었고, ‘AICAN’(2018)이 생성한 작품은 많은 이들에게 인간의 작품이라는 판정을 받아냈다.

사실 이번 ‘미드저니’ 사건도 일종의 튜링 테스트라 할 수 있다. 작품에 우승을 안겨 준 심사위원들도 그게 기계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니까. 한 가지 특별한 것이 있다면, 이번엔 기계가 튜링 테스트를 통과하는 수준을 넘어 아예 인간들을 제치고 우승까지 했다는 것.

이것이 많은 이들을 불안하게 한 모양이다. 기계가 계산 기능을 넘어 창조성과 독창성의 영역인 예술까지 정복해 버렸다. 그러니 인간의 예술은 이로써 끝이 난 게 아닌가. 그렇다면 정말 이제 기계가 생각을, 심지어 인간을 능가하는 창의적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비트겐슈타인이라면 이를 부정할 것이다. 그에 의하면 ‘기계가 생각을 하는가?’라는 물음은 일상언어의 문법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 가짜 물음에 불과하다. 즉, ‘기계가 생각을 하는가?’라는 물음은 그 성격이 ‘기계가 치통을 앓는가?’라는 물음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누군가 ‘기계가 치통을 앓는다’고 한다면 정신 나간 소리라고 할 게다. 그런데 ‘기계가 생각을 한다’는 말은 왜들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가. 한마디로, 오직 인간에게만 적절히 사용할 수 있는 술어의 적용 범위를 엉뚱한 데까지 확장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비트겐슈타인은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기술적으로 해결할 경험적 과제가 아니라, 분석적으로 정리해야 할 개념적 혼란이라고 보았다. 즉,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 기계가 인간을 완벽하게 모방하더라도 ‘기계가 생각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드저니가 이번 우승을 통해 “창작성과 예술성을 인정받았다”는 말을 보자. 이 문장 속에서 미드저니는 미적 주체로, 즉 ‘AI 화가’로 상정된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AI는 화가가 아니다. 대회의 우승자는 엄연히 인간, 즉 ‘미드저니를 통한 제이슨 앨런’이었다.

사실 미드저니는 소프트웨어에 불과하다. 그래서 특정 값을 입력하면 아무 생각 없이 알고리즘에 따라 끝없이 이미지를 생성해낸다. 물론 그 무수한 이미지가 다 작품일 수는 없다. 그 이미지를 작품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그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인간의 ‘미적 선택’이다.

이는 이미 오래 전에 개념적으로 해결된 문제다. 1917년에 마르셀 뒤샹이 소변기(‘샘’)를 미술관에 가져왔을 때, 한 여성 평론가는 그의 작업을 이렇게 정당화했다. “비록 머트 씨(뒤샹)가 ‘샘’을 제작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선택한 것은 그였다.” (‘he CHOSE it.’)

AI가 인간의 예술을 위협하는가? 그렇지 않다. 사진이 등장했다고 회화가 죽지는 않았다. 외려 회화는 정확한 기계적 모사의 과제를 카메라에 맡기고, 기계가 할 수 없는 더 높은 창조의 영역으로 비약할 수 있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현대회화다.

AI 예술도 다르지 않다. 알고리즘화할 수 있는 것은 더이상 창조적 과정이 아니다. 그런 과정은 기계에 처리하도록 맡겨놓고 인간 예술가는 더 높은 창조성의 영역으로 비약하게 될 것이다. 과거에 카메라가 그랬듯이 AI도 인간 예술가을 돕는 유용한 ‘툴’일 뿐이다.

실제로 미술대회 주최 측에서는 ‘그 작품이 AI로 생성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았어도 상을 주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이미 예술계가 AI를 이용한 창작을 정상적인 창작의 관행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AI의 발전을 위협으로 느끼는 이들이 있다면, 이는 그들의 작업이 그다지 창조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여전히 알고리즘화할 수 있는 영역에 머물러 있음을 뜻할 게다. 예를 들어 조영남의 조수 사용을 비난하던 작가들, 솔비에게 ‘사과는 그릴 줄 아냐’고 비아냥거리는 작가들은 AI 예술의 발전 앞에서 생존의 위협을 느낄 만하다.

진중권 전 동양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