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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수정의 시선

"다음 생엔 부잣집에 태어났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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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수정
김수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수원 세 모녀, 보육원 대학생 비극

드러난 일부일 뿐, 아사자도 있어  

도움 구할 기력도 없는 이에 빛을

김수정 논설위원

김수정 논설위원

8월이 간다. 폭우, 폭염의 기세와 함께 우리 사회 그늘진 곳을 고스란히 보여준 아픈 여름이 물러간다. 고립무원, 바닥으로 더 깊이 숨어들던 수원의 세 모녀가 세상을 등진지 두 달 만에 발견되고, 그저 서 있기만 해도 어여쁜 스물도 안 된 청년들의 좌절, 극단적 선택이 우리 마음을 무겁게 했다.
 "아직 못 읽은 책이 많은데..." 보육원을 나와 홀로서기를 감당하지 못한 대학 새내기 A군. "지병과 빚으로 생활이 힘들었다.” 암과 싸우던 69세 어머니와 희귀 난치병을 앓는 49세 딸, 이들을 책임져야 했던 42세 딸. 이들이 남긴 메모는 8년 전 생활고 끝에 숨진 송파 세 모녀의 글을 다시 떠올렸다. "주인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26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수원중앙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수원 세모녀' 발인식에서 수원시 관계자들이 세 모녀의 위패를 옮기고 있다. 영정 사진을 챙겨줄 친지가 없어 빈소엔 위패만 모셨다. [연합뉴스]

26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수원중앙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수원 세모녀' 발인식에서 수원시 관계자들이 세 모녀의 위패를 옮기고 있다. 영정 사진을 챙겨줄 친지가 없어 빈소엔 위패만 모셨다. [연합뉴스]

  시신을 인수할 가족이 나서지 않아 '공영장례'로 치러진 수원 세 모녀의 빈소는 대통령과 총리, 도지사 등이 보낸 조화로 가득 찼다. 한덕수 총리, 김동연 경기도지사, 여·야 정치인은 물론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도 조문했다. 빚 때문에 전입 신고도 하지 않은 채, 도와달란 목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생을 마친 그림자 가족을 언론 카메라 플래시가 마지막까지 환히 비췄다.
 송파 세 모녀 사건 이후 알려진 2020년 방배동 모자 사망 사건, 지난 4월 창신동 모자 사망 사건 등은 정부의 손길이 닿지 않은 복지 사각지대가 여전함을 보여줬고 그때마다 세상은 떠들썩했다. 그런데 이게 다일까. 고독사 등 시신이 늦게 발견된 현장을 치우는 특수 청소와 유품 정리 일을 16년째 하는 김새별 바이오해저드 대표는 "세상에 드러난 사연은 일부일 뿐"이라고 했다. 코로나19 이후 더 많아졌다고 한다.
 김 대표는 지난달 26일에도 서울 강서구에서 50대 초반 남매의 마지막 흔적을 정리했다. "햇빛 한 점 안 들어오는, 습한 반지하였어요. 17년간 사셨대요.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17만원. 건강이 나빠졌다고 들은 집주인이 월세 독촉을 않고 기다려 주다 오히려 늦게 발견된 거죠. 기초수급자 신청을 했는데 젊어서 안 됐다고 해요. 부모 이혼으로 어릴 때부터 어렵게 둘이 살았는데 희소병까지 얻으니 극단 선택을 한 거죠." 수원 세 모녀와 비슷한 상황이다.
 김 대표의 또 다른 기억.  "40대 후반 남자분, 마포 쪽이었어요. 멸치 몇 마리뿐, 쌀 한 톨 없었어요. 아사한 거죠. 동네 사람들이 '왜 일 안 나가냐'고 물어봤는데 일을 못 구해 큰일이라고, 동사무소도 다녀왔는데 도울 대상이 아니란 말만 들었다고 했답니다." 국내에서 연간 1000건 발생한다는 고독사 가운데 상당수가 생계 문제로 인한 극단적 선택이나 아사라고 김 대표는 여긴다.
 "정말 힘든 분들은 어떻게 도움을 받는지도 몰라요. 노인들은 사회복지사가 챙기기라도 하지만 40~50대가 문제예요. 건설 현장도 임금이 올라 외국인을 주로 쓰고 알바 자리도 그 나이엔 힘들어요. 요새 굶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하는데, 동전까지 끌어모아 컵라면 몇 개로 연명한 흔적을 많이 봐요." 2019년 7월 31일 관악구 임대 아파트에서 숨진 지 두 달 만에 발견된 40대 탈북 여성과 6세 아들이 그랬다. 5월 13일 3858원 출금, 통장 잔액은 0원. 냉장고엔 고춧가루만 있었다. 주민센터에 도움을 청했지만 중국 남편과의 이혼확인서를 받아오란 말만 들었다고 한다.
 궁지에 몰려서도 어떻게든 살아보려 한 자국을 보면 답답하고 화가 난다고 했다. "긴급생활지원금 신청서가 있더라고요. 담당 공무원 전화번호도 있고. 서류도 정말 많고 복잡해요. 희망고문이었던 거죠. '동사무소에서 왔다 갑니다. 연락주세요'란 메모가 붙은 집도 몇 집 있었어요. 차라리 사람을 패거나 도둑질을 해 교도소에 갔으면 먹고 살 순 있지 않았을까. 고인의 '마지막 이사'를 해주는 일을 하다 보면 드는 생각입니다."
 김 대표는 청주에서 복지관과 연계해 고립된 이들을 찾는 일도 한다. "문을 두드려도 대답 안 해요. 숨어든 사연이 있거나 상담할 의지, 기력조차 없죠. 주민센터에서 명절 생필품 준다는 홍보물을 밀어 넣거나 편의점 등을 탐문하면 효과가 있어요."
 수원 세 모녀 빈소를 찾은 한 시민은 "이분들이 다음 생엔 부잣집에 태어났으면 좋겠다"며 울먹였다. 또래의 비극을 들은 한 대학생은 "코로나 지원금 10만원 받은 게 죄스럽다"고 한다. 사실 세 모녀는 몇년 전까지 어렵지 않게 살다 가장이 사업 빚만 남기고 사망하고 장남이 루게릭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궁지에 몰린 가정이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도, 상황 변화로 절벽에 몰리더라도 도움의 손길 속에 인간다운 삶을 누리고, 보육원에서 자라도 당당한 사회인으로 독립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참다운 복지 국가다. 대통령이 '특단의 대책'을 지시하고 보건복지부와 각 지자체가 앞다퉈 정책 보완을 약속했다. 도움이 절실한 그늘, 그림자에 빛이 닿길 기대한다.

수원 세 모녀, 보육원 대학생 비극 #드러난 일부일 뿐, 아사자도 있어 #도움 구할 기력도 없는 이에 빛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