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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우는 판타지일까…자폐 음악가 가족과 11년 동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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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다큐 영화 ‘녹턴’의 주인공 은성호씨(가운데)와 어머니 손민서씨(왼쪽), 이들을 11년간 촬영한 정관조 감독.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다큐 영화 ‘녹턴’의 주인공 은성호씨(가운데)와 어머니 손민서씨(왼쪽), 이들을 11년간 촬영한 정관조 감독.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주변에서 제일 많이 들었던 얘기가 ‘너무 비효율적으로 일한다’는 거였어요. 그냥 찍어서 쌓아두고 있으니까 ‘이게 쓰이긴 하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는데, 저 자신도 답을 알 수가 없었죠. 그렇지만 참고 또 참으니까 결국 각본 없는 드라마가 탄생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난 18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녹턴’을 만든 정관조 감독의 말이다. 정 감독은 2008년부터 무려 11년 동안 음악적 재능은 뛰어나지만, 자폐 스펙트럼을 지닌 은성호(38)씨와 그의 가족을 촬영해 작품을 완성했다. 2019년 제작을 마쳤고 2020년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다큐멘터리 영화상을 받았지만 코로나19 때문에 국내 개봉은 최근에야 이뤄졌다. 지난 22일 서울 서초구 한 카페에서 성호씨와 어머니 손민서(65)씨, 그리고 두 사람을 오랜 시간 지켜본 정 감독을 함께 만났다.

‘녹턴’은 피아노와 클라리넷 연주에 능하지만, 머리도 혼자 감지 못할 정도로 일상생활이 어려운 성호씨와 그를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 어머니 손씨, 그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비장애인 동생 건기(32)씨의 일상을 담았다. 온종일 형에게만 매달리는 엄마의 모습에 서운함과 답답함을 느끼는 건기씨의 시선도 여과없이 담았다. 이 점에서 자폐인을 다룬 기존 서사들과 차별화했다.

형 못지않게 음악에 흥미가 있었지만, 결국 이를 포기해야 했던 건기씨는 형을 함께 보살피길 기대하는 엄마를 향해 “형한테 쏟은 정성을 나한테 쏟았으면 어땠을까”라며 “가족은 가족, 내 인생은 내 인생”이라고 선을 긋는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속 우영우가 대변할 수 없었던 수많은 장애인과 그들 가족의 삶이 도도하게 존재함을 이 다큐는 보여준다.

영화 ‘녹턴’은 자폐 장애가 있는 음악가 은성호씨와 그의 가족을 담았다. [사진 시네마달]

영화 ‘녹턴’은 자폐 장애가 있는 음악가 은성호씨와 그의 가족을 담았다. [사진 시네마달]

이들의 기나긴 동행은 2008년 정 감독이 방송 다큐 촬영차 성호씨를 찾으면서 시작됐다. 두 달에 한 편씩 휴먼 다큐를 찍던 정 감독은 유독 성호씨에게 “맑은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제가 성호의 ‘우주 최강 팬’이었어요. 그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무한히 마음이 비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거든요. 그 매력을 사람들이 좀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인연은 방송 촬영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정 감독은 성호씨 가족과 연락을 이어가다 2013년 이들을 다시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처음 만났을 때 고교생이던 건기씨는 성인이 됐고, 손씨의 머리는 하얗게 세기 시작한 때였다. 건기씨가 형에게 ‘올인’하는 엄마의 정성이 “부질없다”며 집을 나가 방황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때도 뚜렷한 목표는 없었고, 그저 제가 성호·건기를 워낙 좋아하니까 가끔 촬영하면서 같이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찍다 보니 ‘2008년부터 영상이 있으니, 그 세월을 담으면 좋은 다큐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죠.”(정 감독)

정 감독은 어떤 정해진 틀도 없이 그저 이들 가족 옆에서 오랜 시간 묵묵히 카메라를 들었다. 손씨조차 “이게 언젠가 작품이 되리라고 상상할 수 없었다”고 했을 정도다. 정 감독은 “그렇게 찍는 게 다큐의 숙명이자 본질”이라며 “우리 인생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다가 무언가가 나오는 것처럼, 다큐도 그저 차곡차곡 기록해 놓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말했다.

‘녹턴’은 내내 갈등하던 형제가 처음으로 엄마 없이 떠난 러시아 공연에서 음악을 매개로 서로 통하는 찰나의 순간을 비추면서 막을 내린다. 다큐는 이를 완전한 화해로 표현하진 않지만, 형제가 공존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한 줄기 희망을 보여준다. 정 감독은 “이 갈등이 언젠가 해결될 거라는, 어떤 조그만 틈이라도 서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며 “엄마는 몰랐지만, 건기씨는 엄마를 향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가득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성호씨도 동생에 대해 “(건기가) 옛날에는 사춘기라 그랬다. 지금은 예뻐졌다”며 “러시아에서 도와준 고마운 동생”이라고 말했다.

손씨는 “성호는 친구가 한 명도 없고 지하철에선 사람들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지만, 무대에선 연주복을 입고 박수를 받으면서 자기 존재를 나타내는 느낌”이라며 “이 다큐로 성호가 음악 하는 친구라는 게 알려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 감독은 “어두운 밤하늘에 ‘음악’이라는 별 하나를 보면서 긴 세월을 헤쳐 온 성호 어머니를 보면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많이 배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녹턴’은 내가 가는 길에 가이드 역할을 해준 작품으로 이를 바탕으로 좀 더 좋은 다큐를 만들고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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