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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탕 청소'에 목숨만 겨우 건졌다…강남 한복판 판자촌 고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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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지난 8일 수해로 집이 떠내려 간 자리가 비어있다. 구룡마을 건너편에선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이수민 기자

지난 8일 수해로 집이 떠내려 간 자리가 비어있다. 구룡마을 건너편에선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이수민 기자

19일 오후 서울 마지막 ‘판자촌’으로 불리는 강남구 개포1동 구룡마을. 주민 한영애(76)씨가 한쪽 벽면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자신의 집을 힘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물을 연신 퍼내는 바람에 그의 손은 퉁퉁 부어 있었다. 650가구 800여명이 사는 이 마을은 지난 8일 서울에 내린 기록적인 집중호우로 쑥대밭이 됐다. 주택 대부분이 물에 잠기고 일부는 무너졌다.

한씨는 집이 물에 잠겨 피하지 못하다가 119구조대에 간신히 목숨만 건졌다. 당시 상황이 워낙 긴박해 ‘틀니’도 챙겨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1989년부터 이곳에 살고 있다. 당시 마을 건너편에 있는 아파트는 한 채에 1500만원이었다. 한씨 집은 이보다 900만원 저렴한 600만원이었다. 한씨 집과 근처 아파트 가격 차이는 30년 전 2.5배에서 150배가 됐다. 한씨는 "대출까지 받아 마련한 돈이 600만원밖에 없어 인근 아파트에 입주하지 못했는데 상습 물난리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한영애(76)씨의 손. 침수된 집 안의 진흙물을 퍼내느라 손이 퉁퉁 불었다고 한다. 이수민 기자

한영애(76)씨의 손. 침수된 집 안의 진흙물을 퍼내느라 손이 퉁퉁 불었다고 한다. 이수민 기자

장마철은 '진흙탕 청소철' 

구룡마을 주민은 장마철을 ‘진흙탕 청소철’로 부른다. 장마가 시작되면 인근 대모산에서부터 흘러 내려온 각종 쓰레기와 폐목·토사가 마을 도랑을 막는다. 이 바람에 침수피해를 본다. 물이 빠지면 벌건 토사와 오물 등이 마을 곳곳을 휩쓸고 지나간 흔적이 보여 이를 진흙탕 청소로 부른다. 주민들이 모두 대피할 정도로 큰 물난리가 난 건 올해가 4번째라고 한다.

주택 침수 피해를 본 이 마을 주민들은 현재 강남구가 마련해준 숙박시설에서 지내고 있다. 그나마 다행히 정부는 22일 구룡마을이 포함된 개포1동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면 수해복구 비용 가운데 최대 80%까지 정부가 지원한다.

주민들은 벌써 겨울 걱정 

이런 가운데 일부 주민들은 벌써 겨울 걱정을 한다. 마을에서 화재가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다. 화재 주요 원인은 낡은 건물에서 발생하는 누전 현상이다. 주택이 다닥다닥 붙은 판자촌이어서 일단 한번 불이 나면 피해가 크다. 2014년 화재 땐 주택 16개 동이 전부 타고 주민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2017년 2022년에도 큰불이 났다. 이곳에는 소방차 한 대가 상주하고 소화기도 1100개나 비치됐다. 주민 박모(64)씨는 “진작에 재개발됐으면 이런 피해도 없었을 텐데 이젠 (재해가) 지긋지긋하다”며 한숨을 쉬었다.

도로 하나 사이에 두고 딴 세상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구룡마을 주민들은 재개발을 원한다. 하지만 주민과 지방자치단체 간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당초 서울시는 2020년까지 서울주택도시공사(SH) 주도로 임대 1107가구를 포함한 2692세대 규모 아파트 단지를 건설키로 했다. SH는 공영개발 과정에서 거주민에게 임대아파트 제공과 임대료 감면을 제안했다.

하지만 주민들이 반대했다. “이곳에 정착해 30년 넘게 살았다”며 “임대가 아닌 분양권을 달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와 SH는 “무허가 주민들에게 분양권을 줄 법적 근거가 없다”고 했다.

현행 토지보상법에 따르면 무허가건축물 소유자는 이주대책 대상자가 아니다. 대신 SH는 주민들에게 임대 아파트 완공 전까지 다른 SH 임대주택에서 보증금 없이 월세로만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했다.

재개발 방식 두고 주민들도 ‘갈등’

이에 대해서도 주민 의견은 엇갈린다. 주민 대다수는 고령층인 데다 형편이 어려워 임대료를 부담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주민들은 대부분 공공근로, 경비 아르바이트, 가사 도우미 등으로 생계를 잇고 있다.

구룡마을에 살며 구멍가게를 같이 운영하고 있는 A씨(75)의 집. 지난 8일 기록적인 폭우로 물이 방 안까지 차 벽 한쪽에 구멍을 내 물을 빼냈다고 한다. 이수민 기자

구룡마을에 살며 구멍가게를 같이 운영하고 있는 A씨(75)의 집. 지난 8일 기록적인 폭우로 물이 방 안까지 차 벽 한쪽에 구멍을 내 물을 빼냈다고 한다. 이수민 기자

또 2018년 이주대책에 따라 먼저 임대 아파트로 떠난 454세대(1107가구 중) 주민들은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완공 예정 시기(2020년)기 2년이 지났는데도 첫 삽을 뜨지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자 주민들은 마을 입구에 텐트를 치고 시위하는 중이다.

서울시와 SH는 가급적 올해 안에 개발 계획을 확정할 계획이다. SH관계자는 “임대주택 비율 구체화, 로또 분양 방지 등의 방안을 마련하기위해 주민 등과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구룡마을 등을 지역구로 둔 김현기 서울시의회 의장은 “공영개발 방식으로 확정된 만큼 원래대로라면 주민들에게 임대 아파트로 제공하는 게 맞다”면서도 “하지만 주민들의 의견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기존과는 다른 방식의 개발 계획이 확정될 수 있도록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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