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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후남의 영화몽상

1983년의 헌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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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후남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후남 문화선임기자

이후남 문화선임기자

첩보영화의 주인공들, 그러니까 첩보원들에게 ‘의심’은 필수적인 직업병처럼 보인다. 내 편인 줄 알았던 인물이 알고 보니 남의 편이거나 이중첩자로 밝혀지는 일은 실제 첩보전에선 어떤지 몰라도, 첩보영화에서는 자주 벌어진다.

이정재와 정우성이 투톱 주연으로 활약하는 영화 ‘헌트’ 역시 첩보조직 내에 신분을 감춘 스파이가 있다는 의심이 이야기 전개의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한다. 한데 이 조직에서 벌어지는 스파이 색출 작업은 통념처럼 비밀스럽지가 않다. 조직의 새로운 수장은 서로 다른 두 팀 리더를 각각 불러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 상대 팀 뒤를 캐라고 지시한다. 안 그래도 사이가 껄끄러웠던 두 리더, 박평호(이정재)와 김정도(정우성)는 이제 공공연히 대립하고 노골적으로 충돌한다. 사실 이 조직은 전에 다른 사건에서도 범인을 조작한 이력이 있다. 이번에도 진짜 스파이를 찾는 것보다 누구든 스파이로 만들어 색출에 성공했다는 성과를 내세우려 할지 모른다. 과연 스파이가 누구인지만 아니라 정말 스파이가 있는지도 의심스러워진다.

이정재·정우성 주연의 영화 ‘헌트’.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이정재·정우성 주연의 영화 ‘헌트’.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첩보물의 고전적 ‘의심’을 흥미롭게 변주한 이 플롯은 언제 어디라도 어울릴 것 같은데, 이 영화는 구체적으로 1980년대 초반의 한국을 배경으로 삼는다. 당시는 제5공화국 정권이고, 이 첩보조직은 안기부다. 영화는 초반부터 고문 장면 등으로 그 폭력성을 뚜렷이 보여준다. 범인 색출만 아니라 범인 조작이 낯설지 않은 것도 그래서다.

나아가 영화에는 80년대의 구체적인 사건, 특히 1983년의 이웅평 귀순이나 아웅산 테러 등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실제 사건들을 변용한 사건과 인물이 극적 전개의 중요한 모티브로 나온다. 모르고 봐도 영화 흐름을 이해하기 힘들진 않지만, 알고 보면 그 디테일까지 상당히 치밀하다는 점에서 영화가 한층 흥미롭고 탄탄하게 보인다.

짐작건대 제작진은 시나리오 단계부터 80년대의 사건들을 열심히 조사하고 살폈을 터인데, 완성된 영화는 그 재현보다는 장르적 활용으로 균형을 잡는 점이 인상적이다. 특히 현대사를 다루는 영화들이 종종 부담감에 짓눌리는 것과 달리 이 영화는 현대사의 사건이 지닌 무게감을 납득할 수 있게 활용하면서도 첩보 액션 영화라는 장르적 성격을 충실하게 구현한다. 현대사를 활용하는 이후의 다른 영화들에도 참고가 될만한 지점이다. 주연 배우이자 이 영화로 연출에 데뷔한 이정재가 여러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처음 접한 시나리오의 제목은 ‘남산’이었다고 한다. 이정재 감독은 판권 구매 뒤 4년에 걸쳐 시나리오를 고쳐 썼고, 영화 역시 지난 5월 칸 영화제에 처음 공개한 이후에도 설명이 복잡한 부분 등을 다듬었다고 한다. 어떤 부분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이런 궁금증을 접어두어도 좋을 만큼 완성도 높은 데뷔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