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look] ‘헌트’에 등장한 이웅평·아웅산테러…‘분단’이 장르가 됐다

중앙일보

입력 2022.08.17 00:01

업데이트 2022.08.17 09:30

지면보기

종합 16면

이정재, 정우성 주연 첩보 액션 영화 ‘헌트’. 배우 이정재의 감독 데뷔작이다.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이정재, 정우성 주연 첩보 액션 영화 ‘헌트’. 배우 이정재의 감독 데뷔작이다.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이정재 감독의 ‘헌트’가 개봉 7일째인 16일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 ‘탑건: 매버릭’보다도 하루 빠른 기록이다. 배우의 상업영화 연출 데뷔작으로서 기대 이상의 흥행 속도다.

‘헌트’는 ‘한국형 첩보영화’의 길을 따라가면서도 과감한 총격전과 새로운 유형의 인물을 배치했다. 한국의 첩보영화가 전통적으로 다뤄온 ‘분단’의 갈등에 새롭게 고민하는 주인공을 덧입힘으로써 기존 장르에 활력을 더하고자 한 것이다.

사실 첩보영화엔 나름의 조건이 있다. 할리우드에서 첩보물이 득세한 배경에는 1,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실질적인 첩보전이 펼쳐졌고, 냉전 시대를 거치며 미국 내의 스파이 색출이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매카시즘의 광풍은 영화 안으로 스며들어 다양한 형태의 첩보물을 만들어 냈다.

영화 ‘헌트’ 포스터. 영화는 1980년대 안기부 내부 첩자를 밝히려던 요원들이 대통령 암살 음모에 다다르는 과정을 그렸다.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영화 ‘헌트’ 포스터. 영화는 1980년대 안기부 내부 첩자를 밝히려던 요원들이 대통령 암살 음모에 다다르는 과정을 그렸다.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1962년 ‘007 살인번호’로 시작된 007 시리즈는 한국에도 영향을 끼쳤다. 정창화 감독의 ‘순간은 영원히’(1966)를 보면, 첩보원의 특수 무기, 자동차 장면 등 007 시리즈의 영향이 짙게 느껴진다.

로케이션을 통한 사실성 강조와 화려함도 첩보영화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다. 한국·홍콩 합작영화 ‘순간은 영원히’에서 시작해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2013), 윤종빈 감독의 ‘공작’(2018), 그리고 ‘헌트’의 배경(일본·태국 등)에 이르기까지 그 맥을 유지하고 있다.

역대 한국 첩보영화 주요 작품

역대 한국 첩보영화 주요 작품

그런데 한국 첩보영화의 관심은 규모나 볼거리만에 머무르지 않았다. 해방 이후 신탁 통치와 함께 시작된 남북의 분단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그 어느 국가보다 강력한 냉전의 논리를 형성했다. 유신 시대였던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의 첩보물은 대다수가 ‘반공’을 강조하는 첩보영화였다. 이만희 감독의 ‘암살자’(1969)처럼 이분법을 비켜나 공산당 내부의 갈등을 보여주는 작품도 있었다. 당대 최고의 액션 스타 장동휘가 연기하는 암살자는 임무에 성공하지만 그 역시 당원 1호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허무의 끝’을 보여준다. ‘헌트’를 본 관객이라면 이러한 결말의 그림자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영원한 우정도 없고, 끝없는 배신만이 난무하는 첩보영화의 결말은 필름 누아르의 검은 빛을 새롭게 모방한다.

포스트 냉전 시대 이후 등장한 새로운 첩보영화의 출발은 강제규 감독의 ‘쉬리’(1999)였다. 북한을 적으로만 인식한 것이 아니라 ‘적과의 동침’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설정을 통해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의 경계를 허문다. 남과 북의 관계를 선악의 구도로 바라보는 낡은 세계관을 탈피하는 시도였다. ‘쉬리’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기원으로 평가받는다는 점에서 첩보영화를 통해 흥행과 의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내는 성과도 보였다.

‘헌트’로 감독 데뷔한 이정재(가운데)와 배우 정우성(왼쪽)·정만식이 16일 관객 200만 돌파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헌트’로 감독 데뷔한 이정재(가운데)와 배우 정우성(왼쪽)·정만식이 16일 관객 200만 돌파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헌트’ 역시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 ‘동림’이라는 북한의 스파이가 등장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부각되는 것은 1980년대 군부독재로 대변되는 남한 사회의 모순이다. ‘헌트’에서 위기를 초래한 것은 외부의 스파이만이 아니라 1980년의 광주를 일으킨 군부독재의 폭력성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윤종빈의 ‘공작’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공작’은 북한의 스파이가 아니라 남한의 간첩을 주인공으로 삼았고, 임무의 완성보다 기득권의 유지와 안기부의 존속을 위해 신념을 허무는 모순의 상황을 드러낸다. 악은 외부가 아니라 안에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다루는 한국 첩보영화의 상당수는 자연스럽게 시대극의 형태를 띤다.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공작’에서는 총선과 대선 장면이 자주 등장하고, ‘베를린’은 김정일 사망 시기인 2011년과 겹친다. ‘헌트’와 ‘이중간첩’(2003)에서는 1980년대의 고문 기술자들의 잔혹함이 노출되며, 무엇보다 ‘헌트’에 깜짝 등장하는 이웅평(황정민)의 모습이나 아웅산 테러 등은 빠르게 소멸하는 현대사의 단면을 환기시킨다. 첩보영화라는 장르적 외관을 두르고 있기는 하지만 한국 사회의 내밀한 문제들을 거론하면서, 정의와 신념이라는 공적 영역과 사랑과 우정이라는 개인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을 통해 장르적 재미 이상의 시대적 무거움을 안겨주는 셈이다. 이러한 시도가 받아들여질 때 첩보영화들은 종종 블록버스터의 자리에 등극한다. 그것은 오래된 이데올로기의 갈등을 태우며 나아가고자 하는 이야기의 힘이자 영화가 사회적 에너지를 이용하는 전략이다.

이상용 영화평론가

이상용 영화평론가

이상용 영화평론가

1997년 제2회  ‘씨네21’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데뷔했다. 부산국제영화제·전주국제영화제 등의 프로그래머로 활동했으며, 평론집 『봉준호의 영화언어』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등을 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